노을빛 불협화음

이리벙 님 커미션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창문으로 새어들어 어두컴컴한 체육 창고를 붉게 물들였다. 본래라면 이 시간대에 아무도 없을 터인 낡은 체육 창고에는 한 쌍의 소년소녀가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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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몇 분 전, 레코딩 연습을 빼먹은 렌을 찾으러 갔던 아야메는 그를 끌고 오는 길에 운동부 친구에게서 체육 창고에 공을 좀 갖다 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아야메는 렌과 함께 체육 창고에 들어갔다가, 온통 번쩍번쩍한 이 학교에서 이질적으로 낡은 그 창고의 자물쇠가 고장 나 갇혀 버린 것이었다.

  이게 무슨 순정만화 같은 일이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아야메는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렌과 자신은 순정만화 같은 상황을 연출할 사이가 아니었다. …아마도. 따라서 아야메는 쓸데없는 생각을 고이 접고서 나갈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낡은 체육창고는 꽤 좁았기에 두 사람은 가깝게 붙어설 수밖에 없었다. 손이 스칠 때마다 아야메는 움찔하며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물러설 자리는 얼마 없었다. 그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 두 사람은 서 있었다.

  어색하고 묘한 공기 속에서 둘은 우선 열쇠를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보통이라면 문 옆에 얌전히 걸려있을 터인 열쇠가 어디에 굴러다니는지 통 보이지를 않아, 그들은 먼지가 날리는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야메는 중간부터 딴생각을 시작했다. 요사이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르고 목이, 마음이 간질간질하길래 환절기 감기인가 싶었는데 다른 이 앞에서는 멀쩡해지는 걸 보면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오직 렌과 함께 있을 때만 그랬다. 지금도 그랬다. 아야메는 뒤돌아선 렌의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 렌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매라니, 영광이야. 멱살부터 시작했는데 말이지~"

  "너는 말을 참…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첫 만남부터 네 멱살을 잡고 시작한 줄 알겠다."

  "아무튼, 열쇠 찾은 거야? 아니면 다른 할 말이라도?"

  "…후자."

 

  아야메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그 낯선 느낌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해야 그것을 털어낼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처럼 빨리 말하고, 빨리 잊자는 게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야메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아름다운 푸른 눈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며 물었다.

 

  "너는 정말…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응?"

 

  렌이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건 이런 상황에 아야메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렌이 알고 있는 아야메는 씩씩하게 창고를 뒤져서 가능한 한 빨리 이곳에서 나가자고 말할 사람이었다. 왜 갑자기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내는지 그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렌은 아야메의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뺨이 붉게 물들어 있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아야메가 한 번 더 말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설렌… 다거나, 두근거린다거나… 그런 일은 없다는 거지?"

  "뭐야, 갑자기. …애초에, '나는 네 레이디도 아기양도 아니다' 고 선언한 건 아야잖아?"

  "그렇지…"

 

  애매한 대답이었다. 부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긍정도 아닌 대답. 하지만 아야메는 그것을 긍정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미적지근한 그의 태도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음에도, 그녀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자신 또한 렌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야메는 다시 열쇠를 찾는데 열중했다.

 

 

  창고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고작 오 분밖에 흐르지 않았음에도, 둘은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갇혀있던 것처럼 느꼈다. 하지만 렌이 갑자기 문 쪽에 서 있던 아야메를 문으로 밀어붙이면서, 침묵은 깨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저기, 아야. 방금 했던 말 말인데."

 

  아야메를 안다시피 하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렌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야메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제발 이 심장박동 소리가 렌에게 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아까는 마주 볼 수 없었던 푸른 눈이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곧 렌은 고개를 아야메의 어깨에 파묻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사실은, 네가."

 

  온몸이 굳어버린 아야메의 귀에는 렌의 목소리 대신 철컥, 하고 무언가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야메가 기대있던 문이 열리고, 그녀의 몸이 휘청했다. 다행히도 렌이 안고 있었기에 그녀의 몸은 중심을 잃지 않았다. 렌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아야메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대했어? 나도 널 좋아해, 같은 말?"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아야메가 본 것은 렌의 손에 들린 열쇠였다. 그리고 렌의 품에서 풀려난 아야메가 다음으로 본 것은, 그의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하지만 직후에, 렌의 미소가 사라졌다. 아야메는 울고 있었다. 정확히는, 눈에 차오른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야메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온 몸이 떨려왔다. 그녀의 심장은 바보 같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바보 같이.

 

  "다시는 이런 장난치지 마, 진구지 렌.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그리고 아야메는 곧장 뒤돌아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달려갔다. 자신이 무엇에 그리도 분노했는지, 슬퍼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야메는 직감했다. 나는 저 애를 좋아하고 있다고. 사실, 훨씬 더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까 안겼을 때는 어쩌면 이 애도 날 좋아하는 걸까, 라고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전부 장난이었다. 바보 같은 장난. 아야메는 렌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난생처음 해보는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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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무는 노을을 등지고 달려가는 아야메를, 렌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운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예상했던 반응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뭐야, 유치하게~' 따위의 말을 하며 품을 빠져나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연습실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 천하의 진구지 렌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저 애가 날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저 애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섣불리 결론 내린 이유를, 그는 알고 있었다.

  드디어 찾아온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