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만의 왕국

  "이대로, 어딘가로 도망쳐버릴까?"

 

  함께 차를 타고 퇴근하던 길이었다. 차로 가득한 도로에 들어서며, 내 입에서 무심코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그동안 신호가 바뀌었기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오후의 햇살이 차창을 넘어 들어와 차 안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 말을 무마하기 위해 힐끗 고개를 돌리자, 조수석 창문에 비스듬하게 머리를 기댄 아야메가 보였다. 하얀 볼이 발그레한 건 사뭇 추워진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이 햇살 때문일까. 갑작스러운 내 말에 당황했을 법도 한데, 아야메는 놀라지도 않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럴까."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란 내가 다시 바뀐 신호에 맞춰 급히 액셀을 밟는 사이, 아야메는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 줘. 너와 나만이 있는 곳으로."

 

  조용해진 차 안에는 돔 라이브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아야메가 틀어놓은 세트리스트 앨범의 노랫소리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1월의 어느 날, 우리는 그렇게 도망치기로 했다.

 

---

 

  "어디로 갈까? 생각해둔 곳 있어?"

 

  아야메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차창 너머로 저무는 노을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가 줘."

  "악마에게 납치당하는 공주님이구나."

  "상냥하게 부탁해?"

 

  그렇게 말한 아야메가 후후 웃었다. 창문에 비친 그 미소는 여느때처럼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어딘가 서글픈 구석이 있었다. 마치 그녀의 뒤로 펼쳐진 저녁노을처럼. 나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핸들을 꺾어 국도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탔다.

 

 

  "목적지 정했어?"

  "시즈오카."

  "시즈오카?"

 

  아야메가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원래 사랑의 도피는 전혀 의외인 곳으로 떠나는 법이야. 그래야지 아무도 우릴 찾지 못하잖아. 그런 실없는 말 대신,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응. 바다 좋아하잖아."

 

 

  아야메는 바다를 좋아했다.

  그녀의 고향인 카와사키는 바다와 맞닿은 도시였고, 그래서 어릴 적부터 자주 가족과 함께 바다에 갔다는 듯 했다. 커서는 가끔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할 때 혼자 바닷가에 가서 멍하니 앉아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한 생각이 파도와 함께 쓸려나가서 좋았다고,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바다와 가까운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녀와 달리 나는 바다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요코하마의 항구는 늘 사람으로 붐볐고, 그 앞에 서면 외로운 어린 나는 더더욱 외로워졌다. 그 안으로 걸어들어가면 그대로 인파에 휩쓸려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밤낮없이 몰아치는 파도는 텅 빈 마음을 채우지 못하고 어딘가에 머물지 못하며 끝없이 방황하던 나와 닮아있어서, 내 눈에 비친 그 풍경은 아름다움보다는 쓸쓸함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그토록 정반대인 유년기를 보냈고, 정반대의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너와 함께라면 아무래도 좋았다.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안겨 주리라고 다짐했으니까, 네가 있다면 나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니까.

 

 

  한 시간쯤 달리자, 어느새 바깥은 어둑어둑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낮 시간 또한 부쩍 짧아진 것이었다.

 

  "사랑의 도피도 좋지만, 배고프지 않아? 저녁 안 먹었잖아?"

  "응, 배고파…"

  "그럼 저녁 먹으러 가자."

 

  쭉 뻗은 해안도로를 따라 조금 더 달리자, 아까 잠시 휴게소에 들렀을 때 예약한 식당이 보였다. 해안도로의 절벽 끝에 위치한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으로, 통유리로 된 벽 너머로 내다보이는 바다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 안내에 따라 식당에 들어선 아야메가 갑자기 멈춰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네…"

  "전부 예약했거든."

  "…아."

 

  이제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아야메는 여전히 나의 소비 방식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사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서 가끔은 일부러 오버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아야메는 대충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테이블을 골라 착석했다. 

 

  "메뉴는 정했어?"

  "으음, 일단 스테이크랑… 아, 파스타도."

  "와인도 시킬까?"

  "됐어, 너 운전해야 하잖아. 혼자 마시긴 싫어."

  "알았어, 그럼 나도 같은 걸로."

 

  음식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짧게 몇 마디를 나누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밤바다 위로 펼쳐진 하늘에는 사탕가루를 뿌린 것처럼 무수한 별들이 반짝였다. 그 밤하늘을 보며, 우리는 분명 같은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곳에 오는 차 안에서 내내 틀려있던 노래를 마음 속으로 흥얼거리며 창밖을 내다 보면, 우리가 앉아있는 장소는 더이상 레스토랑이 아니었다. 우리는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과 찬란하게 울려퍼지는 음악이 가득한 꿈의 왕국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눈꺼풀 너머로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그날 그곳에서 보았던 밤하늘. 팬라이트로 가득 찬 돔의 천장이 서서히 열리자 그 틈새로 쏟아져 내리던 진짜 별들의 빛.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밤의 장막을 가르고 유유히 날아가던 별똥별이 하나 있었다. 그 장소에 있던 모든 이가 잠시 넋을 놓고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똑같은 소원을 빌었다. 이 순간이 영원하게 해주세요, 라고…

  아니,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까지 모두가 그런 소원을 빌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그날의 감동을 회상하며 약간 벅차오른 표정을 짓고 아야메를 향해 시선을 돌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별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는 없었지만, 언제나 내 앞길을 비추던 반짝이는 청록색 눈동자가 광채를 잃고 아주 깊고 어두운 심연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점원의 목소리와 함께 회상은 끝났다. 아야메는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포크를 집어들고 있었기에,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다른 소원을 빌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스테이크 한 조각을 썰어 입에 집어넣고, 그것을 목구멍까지 떠오른 질문과 함께 씹어 삼켰다.

  너는 그날 떨어지는 별똥별에 무슨 소원을 빌었어?

 

 

  우리가 시즈오카에서 묵을 호텔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의 일이었다. 비몽사몽한 아야메를 일으켜, 로비를 들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에서 곧장 객실로 이동했다.

  진구지 재벌이 운영하는 모든 호텔에는 언제나 사장 일가족을 위한 스위트룸 한 층이 비어 있었다. 일가족이라고 해봤자 나와 형 둘밖에 없으니 거의 쓸 일도 없는 객실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이용할 날이 올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지만.

  나는 휘황찬란한 스위트룸 내부를 보고 잠이 달아난 듯한 표정의 아야메를 보고 몰래 웃고는 그녀의 팔을 잡아 침실로 이끌었다. 킹사이즈 침대에 마주 보고 나란히 눕자 쌓였던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눈꺼풀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아야메의 미소가 보였다.

 

  "잘 자. …고마워."

 

  그녀의 말과 함께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내 의식이 끊어졌고, 이내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우리는 시즈오카의 해변가에 있었고, 나는 하얀 원피스 자락을 바닷바람에 펄럭이면서 모래사장을 걷는 아야메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하다고 느낀 나는 치마와 함께 바람에 흩날리는 자줏빛 긴 머리카락을 향해 시선을 옮겼고, 그제서야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늘 그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있던 파란 리본이 없었다. 그때, 아야메가 나를 향해 달려와 품에 와락 안겼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리본은 어디에 뒀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야메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잃어버린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나는 그 의미를 곱씹어볼 틈도 없이, 그대로 꿈에서 깼다.

 

 

  일어나자 침대 위에는 나 혼자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야메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명랑한 대답은 없었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자 테이블 위에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주인을 닮은 동글동글한 글씨로 "푹 자길래 안 깨웠어. 잠깐 산책 좀 다녀올게."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뭘 걱정하는 거야, 나는…."

 

  아야메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여러모로 덜렁대는 부분도 있지만, 충분히 어른스럽고 믿음직한 사람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불안감을 털어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높고 푸른 가을하늘이 끝없이 펼쳐진,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같이 나갔으면 좋았을텐데."

 

  이 사랑의 도피가 얼마나 길어질지에 대해서는 서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길어질 거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았다.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시즈오카뿐만 아니라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 전역의 바다를 여행해도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지중해의 바다를 그녀에게 보여줄 생각 또한 나는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내 아쉬움을 지우고 찌뿌둥한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바쁜 일정 탓에 읽지 못했던 책이나 잡지라도 읽으며, 혹은 영화라도 보며 빈둥댈 생각이었다.

 

 

  영화에 집중하고 싶어 커튼을 쳤기 때문에, 들려오는 물소리가 비를 맞고 서 있는 주인공의 뒷모습을 비추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창밖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엔딩롤이 올라가는 내내 빗소리가 들리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커튼을 걷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맑았던 가을하늘은 어느새 먹구름에 침범당해 때늦은 장맛비를 퍼붓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휴대폰을 들어 아야메에게 전화하려 했지만, 테이블에 얌전히 놓인 그녀의 휴대폰을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부디 아야메가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나갔길 바라며,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녀왔어."

  "허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황급히 수건을 들고 달려나갔다. 나의 간절한 기도를 저버리고, 물을 잔뜩 머금은 자줏빛 머리카락에서 굵고 투명한 빗방울이 뚝뚝 떨어져 아야메의 어깨와 몸을 적시고 호텔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우산을 사지…"

  "지갑을 안 갖고 나갔어."

 

  담담하게 대답한 아야메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자 그녀는 기분 좋은 듯 살며시 미소지으며 수건에 얼굴을 부볐다. 그런 아야메의 모습을 보고 나도 조금 마음이 놓여 웃으며 그녀를 욕실로 안내했다. 그런데 문득, 욕실로 들어가려는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도 낯익다는 생각을 들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그 장면을 떠올리기도 전에 입에서 먼저 질문이 튀어나왔다.

 

  "리본은 어디 갔어?"

 

  허리까지 굽이치며 내려오는 자줏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흰 원피스를 입은 아야메는 꿈속에서와 같은 모습이었다. 꿈에서 깼을 때 느꼈던 불안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아,"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한 감탄사가 내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그러나 아야메는 아무렇지 않게 원피스 위에 입고 있던 가디건의 주머니에서 익숙한 파란 리본을 꺼냈다. 

 

  "젖을까 봐 풀었지."

  "그렇구나. 응… 다행이다."

 

  무엇이 다행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안도했다. 아니, 어렴풋한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 젖지 않은 리본과 푹 젖은 가디건을 받아들고 몸을 돌렸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우리는 밤늦게 잠들어서 해가 하늘 꼭대기에 떴을 때 일어났고, 간단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에는 시즈오카 시내를 산책하거나 호텔 방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는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가거나 호텔의 룸서비스를 이용했다. 핸드폰은 꺼져 있었고, 연예 뉴스 프로그램을 틀지 않는 것이 우리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내가 딱 한 번 그것을 어기고 채널을 돌리지 않은 적이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를 믿고 있다. 꼭 돌아와다오."

 

  이번에 출연한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히지리카와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야메는 멍하니 리모컨을 들고 있는 나를 흘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게 기댔다. 그의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강인했고, 동시에 서글퍼보였다. 그 영화가 시대극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게 어느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인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순간 그게 영화 속 대사가 아닐 거라는 생각조차 했다. 그만큼 그 말은 화면 너머의 우리에게 건네는 것 같았다.

  믿고 있다. 돌아와다오.

  그날 내내, 그 말이 귓가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할래? 룸서비스?"

 

  아야메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 편의점에서 사가는 건 어때?"

  "앗, 좋아!"

 

  가벼운 몸짓으로 호텔 옆 편의점으로 향하려던 아야메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잠깐, 지금 10시인가?"

  "응? 응, 맞아."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일요일이야."

 

  아야메가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며 내 팔을 잡았다.

 

  "렌. 나 먼저 올라가도 될까?"

  "어? 상관은 없지만… 그러면 내가 알아서 사갈게. 먼저 가 있어."

  "고마워!"

 

  달려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이유를 깨달았다. 매주 일요일 10시는,

 

  "마이도! 아이돌 라스베가스…"

 

  경쾌한 목소리와 허스키한 목소리가 동시에 외치는 캐치프레이즈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고보니 요 몇 달 간 너무 바빠서 본방송을 한동안 못봤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아이돌이라는 건 조금 질투가 나지만, 팬심으로 눈을 빛내는 아야메의 모습은 역시 귀여웠다. 나는 도시락뿐만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푸딩도 사가기로 결심하고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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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줘, 사랑의 프로페서! 오늘 사연은 치바 현의 '유리' 씨께서 보내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프로페서. 이번 돔 라이브 정말 멋졌어요." 앗, 고마워~! "저에게는 꽤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서로 힘들 때 곁에 있어줬고, 함께 꿈을 좇는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했어요. 제 입으로 말하기엔 좀 부끄럽지만 무척 이상적인 연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문득 불안해졌습니다. 그가 아니라 저 때문에요. 그는 직업상 많은 사람과 어울려야만 하는데, 그가 내 곁에만 있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착이라던가, 그런 위험한 건 아니예요. 정말로. 다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는데, 알면서도 계속 단둘이서만 살아가고 싶다는, 내가 그의 유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가르쳐주세요, 사랑의 프로페서." …으음… 마치 이번 라이브에서 선보인 유닛곡 "상애 트로이메라이" 가 떠오르는 사연이네… 우선 란란, 어떻게 생각해?

한심한 녀석이군.

엣.

보니까 상대에게는 아직 그런 마음을 밝히지 않은 거지? 그럼 그걸 털어놓는 게 먼저다. 자기 자신도 무거운 마음을 꺼내보이는 게 두려운 것 같은데,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몰라! 갖고 싶으면 갖고 싶다고 말을 해!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면 그게 먼저다.

……….

…뭐야, 레이지. 프로페서의 의견은 어떤데?

어? 아, 아니. 란란의 포스에 압도당했다고나 할까… 응, 멋진 대답이었어! 내가 더 답변할 필요도 없겠어! 유리 씨, 우선은 상대에게 그 마음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

그럼 다음 사연으로 넘어간다. 도쿄의 '란란의 피크가 되고 싶어' ……

---

 

  내가 호텔 방 문을 열자 아야메는 예상대로 소파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고 티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외투조차 벗지 않고 보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쿡쿡 웃으며 티비 화면을 가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그녀 앞의 테이블에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을 꺼내 놓았다. 그 사이, 티비에서는 계속해서 란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갖고 싶으면 갖고 싶다고 말을 해!"

  "와우, 란쨩은 오늘도 파워풀하네…"

 

  사연이 무엇이었을까, 고백 방법을 묻는 걸까? 그렇다면 답변이 너무 과격한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여 붓키의 츳코미가 들려오리라 예상한 내가 고개를 들었지만, 화면에 비치는 건 얼빠진 표정의 그였다.

 

  "멋진 대답이었어!"

 

  정말? 다음 순간 내가 방금 전의 붓키처럼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렇다면 고백 방법을 묻는 사연이 아니었던 건가?

  세팅을 마친 내가 아야메를 부르려고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전부 이해하고 말았다.

  그녀의 뒤에 난 큰 창 너머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요며칠 비가 내린 덕에 밤하늘은 맑고 깨끗할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던 걸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 해안도로에서 함께 보았던 밤하늘을, 그보다도 더 전에 도쿄돔에서 함께 보았던 밤하늘을 떠올렸다. 그제야 나는 이 도피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갑작스럽게 그런 제안을 한 이유도, 네가 그것을 수락한 이유도. 네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도.

  내가 천천히 몸을 들어올리는 동안 티비에서는 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출연진의 신곡 홍보 코너인 듯했다. 나는 화면을 가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아야메의 앞에 섰다.

 

  적어도 자유로워질 꿈 속에서 깊게 영원히 잠들자…

 

  "너는… 둘만의 낙원을 원하는 거야?"

 

  이제와서 그런 욕심을 부리는 거야?

  아야메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맞췄다. 그날, 도쿄에서 떠나 온 이후로 그녀는 내 눈을 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말해줘, 아야메. 너는 그날 떨어지는 별똥별에 무슨 소원을 빌었어?"

 

  도망치려고 하던 나의 등을 밀어 다시 빛의 바다로 올려보낸 건 언제나 너였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너는 둘만의 세계를 원하고 있었다. 아이돌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연인이 되어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걸 나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자고 이야기했다. 너에게 혼날 거라 생각했지만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둘만의 세계에.

  청록빛 두 눈에 비친 내 모습이 흐려졌다. 굵고 투명한 눈물이 피어올라 크고 동그란 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이 떨어질듯 말듯 일렁이면서 빛을 반사시켜서, 청록빛 눈동자는 잘 세공된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발했다. 아야메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팔을 들어 내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볼펜으로 편지를 쓸 때 글자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듯이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 그 수많은 팬라이트의 바다 속에서, 너는 열차 밖으로 몸을 내밀고, 나만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렇게 노래했어. 둘만의 왕국을 세우자고…"

 

  어느새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바뀌었다.

 

  만들자, 우리 둘만의 왕국을…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어. 당장이라도 널 끌어안고 싶었어. 아무도 모르는 장소로, 둘만이 있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어. 네가… 나만의 것이 되어주길 원했어. 그때 갑자기 생긴 마음이 아냐. 원래부터 있던 마음이 그 말을 듣고 폭발한 거야. 그렇지만 넌 그래서는 안되잖아. 너는 아이돌이야. 빛나는 곳에서 모두에게 사랑받아야 해. 나는 그런 너를 사랑해. 사랑하는데…"

 

  타치바나 아야메는 아이돌이라는 존재를 사랑했기에 스스로 아이돌이 되고자 마음먹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은 작곡가로 전향한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안에서는 늘 '연인 진구지 렌'과 '아이돌 진구지 렌'의 경계가 명확했다.

  연인은 연인을 독점할 수 있다.

  아이돌은 팬을 독점할 수 있다.

  그러나, 팬이 아이돌을 독점할 수는 없다.

  바로 그 간단한 사실이 아야메를 폭발시킨 것이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날 나는 아이돌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우리 둘만의 왕국을 만들자고 그녀의 연인으로서 말해버렸다. 

 

  "나는 그날, 별똥별에… 이대로, 어딘가로 도망치게 해달라고 빌었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나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고는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는 나를 너무 사랑해."

  "그래, 맞아. 그래서 가슴이 너무 아파."

  "그렇지만 그것마저도 사랑의 증표니까, 사랑스럽지?"

 

  포옹을 풀자 눈물범벅이 된, 동그랗게 뜨인 눈과 마주쳤다.

  나는 그 노래가 나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 깊고 무거운 사랑을 들키면 네가 놀라 달아날까봐 아닌 척했어. 하지만 너도 나와 같았던 거야.

 

  "네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어…"

 

  숨결이 떨릴 때까지 사랑의 말을 기억에 새기자.

 

---

 

  "나 믿어?"

 

  아야메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고개만은 세차게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이런 장면에서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건 분명 멋없는 짓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급하게 했다가 상처가 곪기라도 하면 그게 더 멋없는 일일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세면대 곁의 손소독제를 집어들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야메는 눈물을 닦고 감정을 추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아야메 앞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입술과 입술이 가까워질수록 내 오른손도 아야메의 왼쪽 귀에 가까워졌지만,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서 눈치채지 못했다. 입술이 맞닿음과 동시에 아야메는 찌릿하고 퍼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아야메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내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있었던 탓에 그러지 못했다. 나는 속으로 아야메에게 연신 사과하며, 어린 아이에게 약을 먹인 후 사탕을 보상으로 주는 것처럼, 할 수 있는 한 가장 다정하고 달콤한 키스를 선물했다.

 

난 님 커미션

  영원처럼 느껴진 짧은 순간이 끝나고 입술이 떨어졌다. 아야메가 왼쪽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내 왼쪽 귓불을 보았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결혼하자, 우리."

 

아야메가 다시 울 것만 같은 표정이 되었다. 너무 잘 울어서 큰일이야, 나의 사랑스러운 울보 공주님은.

 

  "뭐…?"

  "네 불안을 없앨 방법은 이것밖에 없을 것 같아. 내가 너만의 것이라고 온세상에 선포해줘. 나를 끊을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네게 묶는 거야. 지금은 반지가 없으니까… 그 대신 이 피어스에 걸고 사랑을 맹세할게."

 

  그 순간 아야메의 눈에 비친 나는 스스로 보기에도 무척이나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대신에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이 다시 한번 내게로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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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쨩!"

"아야메!"

"선배!"

 

  세 사람이 동시에 나를 불렀다. 나는 그들에게로 달려가서 힘껏 끌어안아주었다. 제각기 걱정과 안도와 질책이 섞인 말을 쏟아놓는 그들의 품에 안기자 그 따스함에 한없이 웃음만 나왔다. 나의 연인, 나의 우상, 나의 동반자는 몇 걸음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 치카, 치즈루쨩. 말도 없이 사라져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정말 고마워. 우릴 믿고 기다려줘서…"

  "타치바나."

 

  감동의 재회도 잠시, 나를 부르는 또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데뷔 10년이 되도록 사고 한 번을 안치길래 조만간 크게 칭찬해주려고 했는데 말야,"

  "서, 선생님…."

  "그게 아쉬울까 봐 이렇게 대형 사고를 쳐주다니… 각오는 됐겠지?"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들이 쭈뼛쭈뼛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체념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어느새 다가 온 렌의 손을 동앗줄 마냥 꽉 붙잡았다. 우리 둘은 그렇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이 된 기분으로 류야 선생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메멩!"

 

  오늘따라 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고개를 들자 언제나처럼 빙긋 웃고 있는 레이지 선배가 집게손가락을 펴서 자신의 왼쪽 귓불을 톡톡 치는 것이 보였다.

 

  "축하해!"

 

  그리고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돌아보았다가, 커다란 손에 뒤통수를 맞았다. 다시 앞을 보자 우리와 류야 선생님 사이에 란마루 선배가 서 있었다.

 

  "……돌아와서, 다행이다."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란마루 선배 또한 레이지 선배를 따라 걸어갔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렌을 올려다보았다. 그 또한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류야 선생님 몰래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많은 이에게 폐를 끼쳤고 그 행동은 벌을 받아 마땅했다. 혼날 각오는 단단히 하고 있었지만,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헤맨 끝에 결국 우리는 해답을 찾았으니까, 다시는 헤매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