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또아타로전설의 대표메뉴 "너의 이름은 제목" 타입...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았습니다 후후

"진구지 렌"이라는 곡과 그 작곡가인 타치바나 아야메... 벌써부터 정말 흥미진진하지요

https://youtu.be/wClDO5gU-is

네 이름은 —.


작곡가 타치바나 아야메, 절찬 작업중. 아야메는 요즘 곡 하나를 고치고 고치느라 바쁩니다. 악보를 노려보다 디지털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고, 피아노를 열었다 닫았다 하고. 동료나 친구들이 너무 무리하지 말라며 걱정하지만 아야메는 지금 아주, 아주 격양된 상태라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한 파트를 일주일 째 고치고 있어도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내가 미친걸까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계속 자료를 다시 읽어보고, 수정안을 계속 되돌리고...

지금 아야메의 작업실은 한적한 방 하나입니다. 집이나 다를 바 없지만 작업실이 따로 있는게 장비 보관이나 일정에 편리했던 모양이죠. 가끔 잠들기도 하는지 옷이나 수건도 보이고, 소품이나 작은 가구는 난색과 초록색이 주로 보여 편안한 분위기입니다. 친구들이 언제 놀러와도 맞이할 수 있는 깔끔한 곳이에요. 하지만 작업실에? 어쨌든 말이죠. 

아야메가 맡은 작품은 이번에 새로 기획된 창작 뮤지컬의 넘버입니다. 렌이라는 인물이 부를, 그를 대표하는 단독 넘버. 그 제목도 이름을 그대로 쓸 것이라 했던 것 같습니다. 작사가가 따로 있지만 아야메의 의견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며, 함께 여러 번 미팅을 했었다지요. 렌이라는 인물은 새로운 배움과 만남을 통해 성장하는, 아무리 장난스러워도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그가 홀로 무대에 서서 부르게 될, 앞으로 존재감이 커질 것이라는 예고와도 같은 대목에 나올 예정인데요. 자기 소개를 하는 노래처럼 느껴집니다. 베이스에 낮은 악기가 여럿 깔리고 점점 소리가 커지고 요란해지며, 하이라이트에서는 빠른 템포로 나아가는 식. 정신 없어지지만 신나는 노래라 할 수도 있겠어요. 재즈, 또는 팝함! 그런 화려함을 신경쓴 노래니까, 무대는 조명을 많이 썼으면 좋겠다고 아야메는 슬쩍 메모에 적어둡니다.

아야메는 소개받은 극의 내용을 읽고 렌의 넘버 작사를 위한 의견을 정리하며, 렌이라는 인물이 친구라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시끌벅적하고, 조금 귀찮고, 하지만 화려하고 심심할 틈 없는 그런 매력을 가진 인물이라 생각해요. 이 곡을 절정에 다다르듯, 하이라이트 파트에서 템포가 점점 빨라지게, 탭댄스라도 춰야 할 것처럼 상상한 것은, 그것 또한 매력이자 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야메가 계속 수정하게 된 것도 평소 작곡하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시도였기 때문일까요? 아주 드라마틱한 느낌을 택해서, 아야메의 노래를 알던 사람이라면 작곡가를 알고 놀랄 거에요.

사실 현재 곡의 퀄리티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가사를 정해나가며, 수정하고 있는 그 부분에 어떤 대사가 어울릴지를 함께 생각하느라 계속 고민하고 있는 거네요. 렌이 이런 말을 할까? 이런 말이라면, 톤이… …회의 전까지 아야메는 A, B, C안을 만들어 가려는 듯해요. 이정도라면 각본가보다 더 신경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시간이 지나 최종안은 렌의 내면보다는 화려함, 바깥의 성격을 더 어필하는 방향으로 결정됩니다. 렌이 처음 부르는 소개 넘버나 다름없기도 하고, 그 성장은 나중에 듀엣 넘버에서 보여질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나중 넘버와 전혀 다른 시원한 곡으로 대비시켜 표현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아야메의 커리어에 이 곡이 조금 새로운 도전이자 대중적인 포인트를 주었는지, 뮤지컬이 오른 이후엔 장르가 다른 의뢰가 도착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그런 곡을 더 많이, 자주 쓸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말이죠. 고민하며 아야메는 극장에 갈 것 같습니다. 렌이 살아 움직이며 부르는 자신의 곡을 들으며, 흥미로운 작업이라고 생각하겠죠. '렌'은 아야메의 첫 인물이자 곡으로서 항상 마음에 남아있을 거예요. 때로 흥얼거려요, 나는 누구의 것도 되지 않아!…


-완성된 극을 본 아야메는

정말 푹 빠져서 봤다는 것 같아요! 이미 내부 자료로 알던 내용도 새롭게 느껴질 정도였대요.

사족: '작품'의 장르는 따로 말씀 안 드렸는데, 음악으로 시작했을 때 역시 그렇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늘 다루는 게 음악이니까 회화나 조각처럼 새로운 쪽으로 부탁드려볼 걸 그랬다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그쪽으로도 한번 더 보고 싶군요.

사족2: 뮤지컬 넘버라고 하는, '캐릭터성이 강한 음악'으로 해석되어 나온 점이 역시 진구지 렌답다고 생각했어요. 데리고 AU를 하려고 해도 근대 이전으로 넘어가기 쉽지 않은, 현대적인 인물이라고 개인적으로 해석하고 있기도 해서 뮤지컬로 등장한 점이 좋았네요. 또 인물로 표현되는 음악, 음악으로 표현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표현자라는 그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 같아서 좋아요. 

사족3: 리딩에 살을 더 붙이는 건 제 자유니까, 이 세계에서도 '렌'을 멋지게 연기해내는 '진구지 렌'이 나타나서 아야메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좋지만, 어쩌면... '진구지 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자신이 숨을 불어넣은 '렌'이라는 인물과 그의 노래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타치바나 아야메, 라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떠올려보기도 했어요. 초연에는 매우 만족한 모양이지만, 어쩌면 재연에 해석이 다른 배우가 들어와서 언짢은 얼굴로 객석을 나가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고 (ㅋㅋ) 반대로 자신의 해석과 다르지만 그것도 그럴 듯하고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해서 흥미를 갖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S#1. 일요일 오전, 사건 발생

  ……좋아. 방향성은 정해졌으니까, 미리 만들어둔 초안을 토대로 슬슬 시작하면 될 것 같아. 3월은 아직도 멀었지만, 일찍    시작해서 나쁠 건 없지……. 음, 느낌이 좋아.
  후후, 곡 얘기할 때의 아야는 언제나 들떠 있어서, 즐거워 보이네.
  그러는 너도 요즘엔 꽤 적극적으로 받아주잖아. 나는 즐거워. 너랑 같이 음악 만드는 거.
  내 덕분이라는 소리?
  맘대로 생각해. 그나저나 일요일 이 시간에 회의하자고 해도 나오고, 진짜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이제 할 마음이 좀 생겼어?
  오늘 선약이 취소됐거든.
  여자애가 퇴짜 놨어?
  퇴짜라니, 말이 심하잖아. 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어.
  네가 그럼 그렇지……. 어쨌든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 먼저 들어갈게.
  수고했어, 내일 교실에서 봐.
  응, 내일 봐. ……아 참, 너 꽃 보관하는 방법 알아?
  뭐라고?
  어제 장미꽃을 받았는데, 오래 시들지 않게 보관하고 싶어서. 역시 꽃병에 꽂아두는 게 좋을까? 너는 항상 주고 다니니까 잘 알 것 같았는데.
  으음…… 항상 주는 쪽이니까 보관까지는 잘 모르겠는걸. 아마 그렇지 않을까?
  잘나셨어……. 꽃병, 매점에서 팔려나? 아무튼 알겠어.
  자, 잠깐만.
  왜?
  장미…… 누구한테 받았어?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게? 
  남자?
  그래.
  어, 정말로?
  왜, 나는 그러면 안 돼?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너처럼 꽃을 마구 주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 받는 사람도 있는 거지, 뭐. 아, 나 진짜 가야 돼! 치카랑 할 얘기 있단 말이야! 안녕!
  아니, 그게, 나는……! ……아아, 이런. 가 버렸네…….

S#2. 목격자 H양의 증언

  진구지 씨?
  안녕, 어린양. 오늘도 아름답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회의는 잘 끝나셨나요? 오늘 아침에 아야메 쨩이 엄청 즐거워하면서 나갔어요.
  푸훗, 그랬단 말이지……. 응, 서로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아. 그쪽은 잘 되어가고 있어?
  네, 저희도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지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래. ……저기, 혹시 어제 아야한테 무슨 일 없었어?
  무슨 일이라뇨?
  아니, 심각한 얘기가 아니야. 예를 들면 선물을…… 받았다던지.
  선물……. 아, 네, 맞아요! 방금 기숙사에서 나오는 길에 인사했는데, 방에서 연분홍색 예쁜 장미를 들고 있었어요. 어제 선물 받았는데, 매점에서 사 온 꽃병에 꽂을 거라고 했어요. 꽃잎이 이렇게 동그랗게 말려있어서,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예쁜 한 송이었어요. 창가에 두면 분명 방이 훨씬 더 화사해질 거예요!
  그렇구나……. 혹시 누가 줬는지는 못 들었어?
  네? 아, 어머……. 진구지 씨가 선물한 게 아니었나요?
  내가?
  아야메 쨩한테 꽃을 주고, 아야메 쨩이 받고서 그렇게 기뻐할 상대라면 틀림없이 진구지 씨라고 생각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아냐. 누구일까……. 나도 그게 궁금해서 말이지.
  …….
  앗, 미안. 내가 너무 붙잡고 있었지?
  아뇨, 괜찮아요! ……저, 알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아야메 쨩이 괜찮다고 하면, 말이지만…….
  응, 고마워. 착한 아이구나.

S#3. 용의자(?) S군의 증언

  내가? 아야메한테? 장미꽃을?
  꼬맹이쨩도 남자잖아? 일단은.
  하?! 너 그거 무슨 뜻이야, 임마!
  농담이야, 농담. 꼬맹이쨩이 멋진 남자인 건 나도 잘 알아. ……그래서, 아닌 거지?
  꽃을 주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어제 아야메랑 마주친 적도 없어. 아마 하루종일 못 본 것 같은데. 나나미도 몰랐으면…… 토요일이었으니까 내내 외출한 거 아냐?
  그렇겠지. ……토요일에, 하루종일 외출해서, 꽃을 받아왔다고…….
  ……뭐하냐, 너?
  응? 내가 왜?
  사오토메 학원에서 여자한테 꽃을 제일 많이 주고 다니는 사람은 렌 너잖아!
  뭐, 그건 그렇지만……. 이거랑 무슨 관련이 있어?
  걔들한테는 미안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너 그거 별 의미 없지?
  이런, 나는 언제나 진심이야. 그렇게 말하면 슬프지.
  그래……. 그러니까 말이다. 네가 그걸 신경 쓰는 모양새가 이상하단 거야. 네가 주는 건 일상이고, 아야메가 받아오는 건 이상해?
  ……그 말, 아야도 했는데.
  잘했네. 근데 걔, 받아도 좋아하려나?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지난번에 네가 A코한테 꽃을 내밀면서 레이디는 어쩌구저쩌구, 하는 걸 보고 ‘지긋지긋해…….’라고 하면서 쌩 가버리던데.
  …….
  그러니까 잘 좀 해라. 파트너잖아! ……앗, 어이, 야!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리기냐! 파트너한테 밉보일 짓 적당히 하라고, 알았지!?

S#4. 용의자(?) T군의 부재

  어라, 안녕, 렌~! 렌이 주말 이 시간에 혼자라니, 신기하네!
  안녕, 잇키. 혹시, 잇치 안에 있어?
  토키야? 토키야는 아까 아침에 나갔어! 전해줄 게 있으면 나한테 맡겨! 가끔은 엄청 늦게 들어오기도 하지만……. 책상에 올려두면 되겠지! 앗, 말을 전하는 거면 정확하게 기억할 자신 없을지도.
  아냐, 괜찮아. 별 건 아니고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방에 없으면 할 수 없지.
  뭐야, 무슨 일이야? 내가 전해줄까?
  방금 기억할 자신 없다고 하지 않았어?
  에헤헤. 그래도!
  ……그럼 어제는 어땠어?
  응? 어제? 아~ 어제도 하루종일 외출이었어!
  어제도? ……왜 나갔는지 알아?
  글쎄, 이유는 나야 모르지? 토키야는 가끔, 아니 자주인가……? 아무튼 주말에 바빠! 나도 궁금해서 몇 번 물어봤는데 절대로 안 알려주고. 
  그렇구나…….
  으음, 꽤 이른 시간에 나갔던 것 같아. 내가 아직 자고 있는데 세수하고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거든. 아, 맞다. 토키야가 나가는 소리 때문에 잠깐 깼는데, 옷은 되게 수수하게 입었는데 거울 앞에서 오래 서 있어서 왜일까~ 하고 생각했었어. ……앗, 혹시 몰래 좋아하는 애라도 만나러 가는 건……?!
  ……하하, 설마. 잇치는 원래 꼼꼼하고 성실하잖아.
  그건 그래~! 마사도 그런 타입이지? 나는 그래서 가끔 토키야한테 혼나기도 했는데…… 렌은 마사한테 혼났다거나 한 적 없어?
  응? 어, 어어……. 우리 방은 거의 대화가 없다고나 할까. 나하고 그 녀석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서.

S#5. 목격자 O군의 증언

  렌이랑 마사도 더 친해지면 좋을 텐데.
  글쎄, 그건 힘들걸. 그런데 잇키, 어제 아야 본 적 있어?
  아야메? 글쎄~? ……아, 나츠키가 본 적 있다고 한 것 같기도!
  시노미가?
  응. 아까 ‘어제는 아침에 즐거워 보이는 아야쨩과 마주쳐서 저도 기분이 좋았어요~’ 라고 했어.
  아침부터…….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잇키.
  잠깐잠깐!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아야메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일 없어.
  그치만 별일 없다기에는 렌 얼굴이 엄청 심각하잖아~
  내가 그랬나? 하하…….
  이것 봐, 지금도.
  음, 그게, 사실은 말이지. 아야가 누군가한테 꽃을 선물받았다고 했는데, 조금 신경쓰여서.
  헤에, 꽃 선물? 그건 렌이 잘하는 거잖아?
  오늘 그런 말을 여러 번 듣네……. 나는 늘 어린양들을 향한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은 것뿐인데.
  응, 솔직한 건 좋지! 좋아하는 마음은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으니까, 나도 이해해!
  그래, 그래. 잇키는 참 올곧은 점이 매력적이야.
  그러면 나츠키가 준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왜, 나츠키는 자주 풀밭에 동물들이랑 앉아있으니까. 그 옆에 있는 꽃을 따서 줬다거나.
  시노미라면 그럴 수 있지만, 장미꽃이라고 했으니까 아쉽게 그건 아닐 거야. 바로 따서 줄 수가 없잖아?
  그것도 그렇네! 그래도 한번 물어보는 거 어때? 탐정놀이 같아, 재밌겠다~

S#6. 온실에서 만난 ???

  (하아…….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꼬맹이쨩 말마따나, 애초에 이렇게 집착할 일도 아닌데……. 됐어. 슬슬 기숙사로 돌아가자.)
  ――의문의 해답을 찾아 이곳까지 도달했군요.
  ……?!
  후후, 확실히 학원에서 장미를 기르는 곳은 이곳, 온실뿐이죠?
  (사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학생인가? 하지만 교복을……)
  들장미라기엔 너무 곧고 가지런하게 다듬어져 있었어. 또, 들장미는 쉽게 꺾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잠깐, 무슨 소리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하지만 이곳도 이곳대로 쉽게 꽃을 꺾을 수는 없어요. 정원 가위는 학원장만이 다룰 수 있어요. 온실의 식물을 마음대로 건드렸다간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겠죠.
  그렇, 겠지.
  또, 넝쿨로 자라는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렇게 예쁜 모양으로 다듬기는 힘들어요. 그건 분명 학원 밖에서 들여온 선물일 거예요.
  ……너는 누구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는 뮤즈를 섬기는 자. 뮤즈의 명에 따라 음악이 자아내는 사랑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자.
  ……뭐라고?
  당신이 이토록 동요하는 이유는 외부에 있지 않아요……. 당신의 마음 속 깊숙이, 진심을 들여다보도록 하세요.
  나는, 그저……,
  때로 진실은 터무니없이 가벼워서, 허무함만을 남기고――
  (사라졌어……?!)

S#7. 목격자 N군의 증언

  어라, 렌 군도 여기에 있었네요?
  우왓!
  앗! 놀래켰다면 미안해요. 반가워서 그만…….
  아아, 시노미, 였구나……. 아냐, 나야말로 놀래켜서 미안.
  렌 군도 꽃님들에게 인사하러 온 건가요?
  으응, 맞아.
  와아~ 렌 군과 마음이 맞아서 기뻐요. 저도 온실을 좋아하거든요. 정성들여 가꾼 꽃들은 들꽃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죠.
  그러네. 아까는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무척 아름다워.
  무엇보다, 이 계절에는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나요. 후후, 겹겹이 포개진 꽃잎이 꼭 요정님의 드레스 같지 않나요?
  ……장미라고 하니, 떠오른 건데…… 어제 아야가 꽃을 선물받았다고 했는데, 그 상대…가 조금 궁금해서. 혹시 시노미는 아는 게 있을까?
  으음, 글쎄요~? 어제라면 아침에 학원을 나서는 모습을 멀리서 보기는 했는데, 그때는 꽃을 들고 있지 않았어요.
  아침에?
  네. 이른 아침에 눈이 뜨여서 좋아하는 언덕 위 자리에서 새님과 함께 이슬이 맺히는 아침의 공기를 즐기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아야메 쨩이 열심히 달려 나가고 있었답니다~
  신기하네. 아야는 아침잠이 많으니까…….
  어린아이 같아서 귀엽네요~
  그렇지. 그래서 주말에는 자주 늦잠을 잔다고 했는데 말야.
  하지만 잠기운도 없어 보였고, 무척 신난 듯한 얼굴이었어요.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요.
  좋은 일, 이라…… 아무튼 고마워, 시노미.
  아야메 쨩, 멋진 만남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후훗, 즐거웠겠네요~

S#8. 용의자(?) M군의 증언

  여어, 히지리카와.
  …….
  사람을 다짜고짜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줄래?
  이런, 미안하다. 네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인사하는 일이 익숙지 않아서 그만. 오늘 아침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을 분명 직접 봤는데……
  그거 농담이라고 하는 말이야? 재미없거든?
  아무튼, 무슨 용건이지?
  혹시 어제 아야 본 적 있어?
  타치바나라면 네 파트너가 아닌가. 그걸 왜 내게 묻지?
  나는 어제 내내 본 적이 없거든. 넌 마주친 적 있나 하고.
  흠, 보통은 타치바나가 내게 반대의 질문을 하러 왔었는데…….
  (뭐야, 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나?)
  어제 만난 적은 있다만,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에 마주쳤다고? 기숙사에서?
  ……하? 설마 무언가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밤산책 중이었다. 차분히 걸으면서 한 주를 돌아보고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어. 그런 시각에 불순한 의도로 여성과 밀회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진구지.
  시끄럽네……. 불순하다니, 나는 언제나 레이디들의 행복만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용건은 이게 끝인가?
  아니, 잠시만 기다려 봐. 상태…… 그러니까, 뭘 갖고 있었다던가, 기분이 어때 보였다던가, 이런 건?
  굉장히 불순하게 들리는데.
  그런 거 아니라니까. 파트너를 알아가려는 과정 중 하나야.
  ……어두워서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공들여서 단장한 모습이었고…… 꽤 흥분 상태였던 것 같다. 내가 인사하는 것도 모르고 지나쳤어.

S#9. 목격자 T양의 결정적 증언

  아, 시부야.
  어머, 진구지 씨?
  우연이네, 이런 늦은 시간에 마주치고. 손에는……
  하하, 이거 좀 부끄럽네.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야식 사 오는 길이었어요. 물론 선생님 몰래! 링고 쨩한테 들키면 저희 죽어요, 비밀!
  그래, 그래, 레이디와의 약속이라면 절대 어기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고맙네요~ 그러는 진구지 씨야말로, 이런 시간에 여기에서 뭐 해요?
  으음, 그냥……. 머릿속이 복잡해서 밤공기를 좀 쐬고 있었어.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실까~? 아야메가 하는 얘기 들어보면, 요즘엔 좀 순조로운 것 같았는데.
  응, 그쪽은 잘 되고 있어. 정말이야.
  헤에, 아야메랑 관련된 고민은 맞다는 거네요? 그런데 과제 말고 다른 쪽이란 소리?
  윽…… 하하, 매력적인 레이디가 눈치가 빠르기까지 하니, 당해낼 수가 없네.
  그런 소리를 잘도 해……. 무슨 일 있었어요?
  그, 어제 아야가 꽃을 선물받았다고 들었어.
  아아, 그랬죠.
  그걸 준 상대가 누구인지…… 신경 쓰여서.
  …….
  …….
  어머, 아직도 그걸로 헤매고 있었어요?
  ……응.
  아야메도 참……. 재밌으니까 냅두라고는 했는데, 그래도 그렇지. 좋아요, 야식 비밀 지켜주는 대신에 내가 알려줄게요. 그거, 레이쨩이 준 거라고 했어요.

S#10. 녹색 R의 남자와 연분홍빛 장미

  ……누구라고?
  레이쨩. 코토부키 레이지. 아야메가 좋아하는 아이돌, 기억하죠?
  ………….
  녹화 방청으로 온 팬들한테 준 선물이었대요. 절대 시들지 않게 하겠다고 아주 온종일 호들갑을 떨었어요.
  ……그런, 것도, 주는구나…….
  뭐어, 나도 안 가봐서 모르지만. 하루카는 알려나?
  으음, 어. 그럴지도. 응……. 알려줘서 고마워, 시부야.
  천만에요~ 아, 꽃이라고 하니까 말인데…… 아야메랑 꽃구경 간 적 있었어요?
  응? 아니, 꽃구경이라고 할 만한 외출은 한 적이 없는데.
  그래요? 벚꽃 필 무렵에, 없어요?
  그때쯤이면…… 학원 전체에 벚꽃이 날리기는 했지. 아아, 따로 어딜 간 건 아니지만,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서 잠깐 얘기했던 적은 있어.
  아하, 그럼 그때인가 보네.
  뭐가?
  그날 악보책에 한가득 떨어진 벚꽃잎을 죄다 주워와서 모조리 압화해 버리려고 하던데. 그렇게 마구 하는 것보다 한둘만 하는 게 예쁘다고 해도 듣지를 않고 ‘어쨌든 전부 보관하고 싶어. 첫 멜로디를 쓰기 위해서는 이 느낌을 꼭 간직해야만 해.’라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 애는, 진구지 씨랑 같이 노래하고 싶어 해요. 엄청나게.
  ……알고 있어.
  무슨 꽃인지가 중요하겠어요? 누가 주는지가 중요한 거지.

S#11. 오렌지색 R의 남자와 붉은빛 장미

  “좋은 아침, 아야.”

  이제 사 개월 남짓 된 파트너의 요란한 행보에 익숙해졌다고 자부하던 아야메는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자칭 사랑의 전도사에게 익숙해질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다. 그 아니면 대체 누가 아침 조례도 시작하기 전 아무도 없는 교실에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앉아있을 수 있을까?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제자리에 멈춰 선 아야메에게, 자리에서 일어난 렌이 다가선다.

  “……나한테 주는 거야?”
  “달리 누가 있겠어?”
  “교실 첫 번째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선물하기, 뭐 그런 건가?”
  “뭐, 그랬어도 이걸 받을 사람은 아야밖에 없었겠지만.”

  안 그래? 라고 묻는 대신 한쪽 눈만 찡긋해서 윙크를 보낸다. 그건 분명 매일 아침마다 S클래스의 문을 가장 처음 여는 사람이 아야메라는 걸 알면서 하는 말이다. 그녀의 귀 끝이 약간 붉게 물들었다.

  렌이 재촉하듯이 밀어주는 장미 꽃다발을 아야메가 받아들었다. 품에 가득 차는 크기가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아무리 당혹스러운 상황이고 얄미운 상대라고 한들 아름다운 꽃에는 잘못이 없다. 그렇기에 아야메도 꽃다발에 코를 파묻고 살짝 향을 맡아 본다.
  우아하게 말린 꽃잎 위로 일렁이는 아침 이슬과 진하게 묻어나는 장미 향이 갓 딴 꽃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알려주었다. 이 이른 아침부터 이걸 대체 어디서 공수해오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은 채 아야메는 꽃다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다행히도 오늘은 조례만 하고 바로 실습이다. 레코딩 룸으로 이동하기 전에 선생님께 잠깐 양해를 구하고 기숙사에 두고 오면 될 것이다.

  아야메가 궁리하는 동안에도 렌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그녀 앞에 내내 서있었다. 아야메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다른 곳을 보던 시선이 슬그머니 돌아와서 눈이 마주친다. 아야메는 렌이 무언가 대답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고 눈치챈다.
  그녀에게서 여느 여자애들처럼 ‘영광이에요, 렌님.’이라는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건 아닐 터였다. 그래도 이유 없는 꽃 선물이 싫지는 않았다. 조금 놀라긴 했어도 기분은 좋았다. 사실 그건 타치바나 아야메가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처음 받은 꽃 선물이었다. 그러니까 고맙다고 말하자. 하지만 ‘고마워’만으로는 너무 짧고 얄팍하니까…….

  아야메는 꽃다발에서 장미를 한 송이 뽑고, 다른 손으로는 렌의 조끼 깃을 붙들었다. 비어있는 단춧구멍에 줄기를 쏙 넣어주고 손을 뗀다. 우연찮게도 그건 묶여있던 장미 중 가장 크고 탐스러운 한 송이였다.

  “줘보기만 했지 받아본 적이 없다며.”
  “으, 응…….”
  “어때? 받는 기분은.”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에 렌이 동요하는 것을 느낀 아야메는 몰래 승리감을 맛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온 대답은 그녀 역시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기뻐.”

  아무런 허세나 미사여구가 없는 수수한 대답. 뺨이 미미하게 붉어진 것이 보인다.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하고, 늘 자신만만하게 치켜올라가 있는 눈썹은 팔자로 구부러져 있었다. ‘진구지 렌’이 지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표정에 아야메는 말문을 잃고 만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답지 않은 얼굴을 보이는 건 렌인데 왜 그녀의 심장이 울렁거린단 말인가. 동요한 적 없는 것처럼, 턱을 한껏 치켜들고 렌이 여자아이들에게 취하는 태도를 흉내내려고 노력하며, 아야메는 여유를 가장한다. 드물게 입을 꾹 닫은 렌이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하나 둘 교실로 들어오는 학생들의 발소리와 함께, 아침 조례 전의 짧은 랑데부는 일단락된다.

S#???. 기억의 압화

  그런 일이 있었어? 어…… 기억 안 나…….
  너무하네, 허니. 그때 나는 엄청 마음 졸였는데.
  그랬으면 그건 다 네 행실 탓이겠지!
  윽,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는 거 알지?
  뭐, 그건 그거고. 내 말은…… 레이쨩 방청을 갔던 건 기억나는데, 그런 선물을 받았었나……? 그게 기억 안 난다는 뜻이었어. 네가 아침부터 교실에서 꽃을 줬던 일은 기억나.
  ……어, 정말?
  응. 왜냐면 그거, 내가 가족 말고 처음 받은 꽃 선물이었거든. 네가 나한테 처음으로 준 꽃이기도 하고.
  그렇지. 나도 네게 처음 받은 선물이었어.
  으음…… 그런 걸 선물이라고 해도 되나?
  당연하지. 나는 엄청 기뻤어. ……사실은 있지, 그 전날에 아마 시부야가 말해줬을 거야. ‘무슨 꽃인지가 중요하겠어요? 누가 주는지가 중요하지.’라고.
  치카는 그때도 지금도 우리 중에 제일 똑똑하단 말이지.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그때 나는, 그 말을 듣고서도 자신이 없어서 결국엔 꽃다발 뒤로 숨어버렸어. 누가 주는지가 아니라, 무얼 주는지를 내세우면서. 설령 네가 내가 주는 꽃은 받고 싶지 않다고 해도 거절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예쁜 장미를 골라왔었어.
  흐음~
  바보 같지?
  렌답네.
  ‘그때의 렌’이라고 해줘…….

 장미목의 꽃엔 극소량의 최음 효과가 있대.

 최음, 이라는 단어를 꾹꾹 눌러 발음하는 아야메의 목소리에서 이제 막 금기를 안 어린아이 같이 조심스럽지만 억누를 수 없는 장난기가 묻어난다.

 그래서?

 내가 되물으면 아야메는 내 목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신다. 쇄골에 닿는 숨이 간지러워 몸을 작게 떨면 아야메가 재밌다는 듯이 웃는다. 키득거리면서 귓가에 속삭이면 -이렇게 예민한 주제에 누가 누굴 안는대?- 내가 대답을 돌려준다 -예민한 건 허니도 만만치 않으니까 할 수 있는 거지.- . 아야메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서 내게 입을 맞춘다. 처음에는 가볍게, 몇 번 반복한 다음에는 좀 더 깊게. 두 개의 호흡과 타액이 맞닿고 뒤섞이면서 열을 발한다.

 네 말대로 장미에 최음 효과가 있고 내가 그 장미라면, 이렇게 키스를 거듭할 수록 너는 나의 향에 빠지게 되는 걸까. 몇번을 더 반복해야 너를 온통 사로잡을 수 있을까? 네가 나만을 원하고 탐하여 깨물고 집어 삼켜서 네 것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겹쳐지는 키스 속에서, 산소가 부족해 흐려져 가는 네 머릿속을 나로 꽉 채우고 다른 생각일랑 할 틈조차 주지 않으며 내쉬는 숨 한 가닥마저 모조리 들이마셔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이것 봐, 지금도 내 머릿속은 너로 가득해서 터질 것 같은걸. 그러니까 너도 같은 고통을 짊어져야지. 그러니까 부디,

 나에게 녹아들어줘.

 입술이 네게 붙잡혀 있어 말로 전하지 못한 그 바람은 혀를 타고 전해졌을까. 아야메는 타고나기를 자극에 민감한 체질이라서, 어느새 의기양양하게 나를 덮쳤던 얼굴은 붉게 물들고 가쁜 숨을 내쉬며 내게 매달려 온다. 꼭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간 토끼 같아서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고 머리칼을 손으로 넘기며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 보면 어깨가 움찔하고 들썩였다. 이런 나의 얼굴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증거다. 턱을 손으로 부드럽게 잡아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하자,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내 손을 떼어 다리 위에 올려두고 이번엔 자기가 내 볼을 손으로 감싼다. 얼굴이 가까워진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하는 거리에서 아야메가 입을 뗀다.

 그런 사진을 찍어놓고 퇴근해서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씩 웃은 아야메가 고개를 치켜들고 나를 내려다본다. 그 모습은 그녀가 연출하려 한 요염함보다는 귀여움을 강조할 뿐이라서,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허리를 끌어안는다. 과연, 방아쇠는 그거였나. 

 상냥하게 해줘.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치켜뜨고 어리광부려보아도 나의 여왕님은 도도하게 -보이길 바라지만 아무리 봐도 귀엽게- 웃어 보일 뿐,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뮤즈가 에로스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가운 자락 사이로 드러난 샤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찬 기운이 도는 살갗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닿자 내가 몸을 움츠린다. 아야메는 내 반응을 보고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저항해보고 싶지만 곧 노골적으로 간지럽히려는 의도를 띤 손길이 옆구리로 파고들어 와서 나는 몸을 들썩이며 아야메를 끌어안는다.

 내 품에 안긴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열기에 젖은 청록빛이 반짝이며 나를 응시한다. 촛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나는 그 빛을 사랑해 그리로 몸을 내던지고, 또 작은 몸뚱아리 안에서 휘몰아치는 탐욕스러운 갈망을 모조리 충족시켜주고 싶다는 욕망에 휘감긴다.

 아니, 아니지. 네가 나를 유혹하는 게 아니야.

 너의 장미는, 너의 비너스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니까.

 가시를 접고 꽃잎을 펼쳐 나의 향으로 널 유혹할 테니 부디 그 가녀린 두 팔로 나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아줘.

S#.1 일본, 도쿄

 해외여행은 무엇보다도, 이방인이 될 수 있어서 좋아. 이방인이 되는 것이 두렵지 않아서 좋아.
 언젠가, 카메라를 목에 건 렌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렌은 길게 휴가를 받으면 곧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갔다. 내가 동행한 적도 몇 번 있지만, 그는 혼자서도 잘만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었다. 렌이 홀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면 나는 굳이 공항까지 따라나가지 않았다. 그는 공항에 사람이 적은 밤이나 새벽 시간대의 비행기를 자주 탔고, 나에게는 나의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볼 수 있도록 문자를 보냈다. "잘 다녀와." 그러면 그에게서 답장이 온다. "다녀올게." 그리고 렌을 태운 비행기가 떠오른다. 렌이 날아간다. 하네다, 혹은 나리타 공항의 활주로를 달려서, 한밤중인 도쿄를 뒤로 하고, 태평양을 가로질러서─

 나는 렌이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좋아한다. 그는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보고 나는 그가 찍은 사진을 통해 렌의 세상을 엿본다. 가장 맘에 드는 사진은 인화하여 책상 앞에 붙여 두었다. 나와 함께 간 크로아티아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다.

 두브로브니크 성벽의 어느 카페에서 활짝 열린 창문 밖을 향해 앉은 렌이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었다. 울긋불긋한 지붕들 너머로 파도치는, 그의 눈동자와 꼭 같은 색을 띠는 맑고 푸른 바다를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언젠가 렌이 벽에 붙인 사진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허니는 정말 바다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나도 사진 찍는 법을 배울 걸 그랬다. 그러면 그 순간 반짝이던 렌의 미소를 찍어서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네가 그 순간 보고 있던 바다를 대신 붙였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렌은 몇 번이라도 다시 새로운 빛깔의 바다를 찍어서 내게 보여줄 테니까. 나는 그때마다 그를 한층 더 사랑스럽게 여기게 될 테니까.

S#2.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낮)

 아르헨티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다. 비행기를 타고 25시간을 가야 하고, 아시아에는 직항이 없어 중간에 반드시 환승이 필요하다. 시차는 도쿄와 12시간 차이가 난다.

 일정을 조절한 끝에 나보다 렌이 하루 먼저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지는 해를 보면서 그는 지금쯤 미국 텍사스에서 경유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보았다. 나와 다르게 에너지가 넘치는 렌은 경유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텍사스의 유명한 음식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공항 라운지에서 그걸 즐기고 있지 않을까. 그런 렌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무심코 웃어버렸다.

 나는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나리타 공항에서 출발했다. 아무래도 나에게 장시간 비행은 고역이었다. 혼자서라면 더더욱. 그래도 몸을 비틀고 수면을 취하고 비몽사몽한 정신을 바짝 세워 경유를 거듭하면서 어떻게든 25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아르헨티나 땅을 밟았다. 날씨는 무척 좋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 서면 쌓인 피로도 훌쩍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공항도 호텔도 아니고 도시의 랜드마크인 오벨리스크 앞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 참 그답다고 생각했다. 헤매지 않도록 몇 번이고 핸드폰 메모장을 확인하면서 공항버스를 타고 광장으로 향했다. 거대한 흰색 오벨리스크는 멀리서도 무척 잘 보였기에 내가 올바른 버스를 탔다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하염없이 폭이 넓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세계 어딜 가도 쉽게 눈에 띄는, 카메라를 목에 건 화려한 미남이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S#3. 아야메의 회상 - 일본, 샤이닝 사무소

 투어 개최까지는 일 년이나 남았지만 그건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따라서 한창 작곡과 공연 구성에 힘써야 할 시기에 우리가 아르헨티나로 훌쩍 떠나온 연유는 물론 관광이 아니라 일 때문이었다.

 "스타리쉬 투어즈" 라는 제목에 맞춰서 세계 각지의 나라를 테마로 한 솔로곡을 낸다는 기획은 작곡가로서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였다. 그리고 진구지 렌이 선택한 나라는 물론,

 "두 가지 정도로 좁혀지는데…."

 "동시에 말해볼래?"

 "좋아. 하나, 둘, 셋…"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그랬다.

 그가 사랑하는 이탈리아는 음악적으로 접근하면 애매해진다. 이탈리아는 뭐니뭐니 해도 클래식과 오페라의 나라니까. 신선한 시도는 좋지만, 라이브에서 오페라를 선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의 역량으로도 그건 불가능하고.

 그의 주특기인 재즈를 선보인다면 미국이라는 선택지도 새롭고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쪽은 이미 토키야가 가져갔다고 들었다. 아쉽기도 하지만, 브로드웨이와 이치노세 토키야란 분명 기대되는 조합이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후보는 스페인이었지만, 이미 이전에 잡지 화보 촬영으로 한 번 간 적이 있었고 플라멩코와 투우사라는 소재를 지금에 써먹기에는 "QUARTET CROWN"이 나온 지 오래 되지 않아 부적절한 시기였다.

 따라서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 진구지 렌하면 탱고, 탱고하면 아르헨티나. 간단한 연결이다. 또, 얼마 전에 그가 남미 일주를 하고 싶다며 사진집을 뒤적이던 걸 본 적도 있었기에.

 내가 정답을 맞추자 렌은 "역시 허니는 날 너무 잘 안다니까." 라며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서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로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생각했다. 가슴 떨리는 상상이었다.

S#4.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밤)

 그렇지만 역시, 지구 건너편까지 와서 일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르헨티나의 타오르는 태양에 대한 실례가 아닌가.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착실히 여행을 즐겼다.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을 구경하고, 새하얀 대리석이 받치고 서있는 성당을 둘러보았다. 붉은 외관의 국립 현대 미술관은 렌의 취향이었고, 오페라 극장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서점은 나의 취향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돌바닥이 깔린 거리가 어둠에 물들어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큰 기대를 품은 행선지로 향하고 있었다.

 거리 모퉁이에 세워진, 지어진 지 족히 100년은 된 하얀 석조 건물.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반질반질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체스판 무늬의 바닥이 깔린 고풍스러운 바가 나타났다. 어느 유명한 영화(*)의 촬영지로 쓰여 더욱 유명해진 탱고 바. 여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일찍이 꼭 가자고 했던 곳이었다.

 책에서 읽은 머나먼 나라에 환상을 품는 아이처럼, 영화 속 풍경을 현실에 덧씌우는 여행자처럼 우리는 그 장소가 이 도시에서 탱고와 사랑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웨이터에게 예약 내역을 확인받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안주와 와인을 주문하고 곧 시작할 공연을 기다리면서 렌을 돌아보았다. 조용하고 차분한 공간과는 다르게, 그 안에 놓인 렌은 어린아이처럼 꽤나 들떠있었다.

 댄서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의 손가락을 홀린듯이 들여다보자, 렌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못말리는 워커홀릭이라니까" 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박자는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점점 빨라지고, 멜로디는 느릿느릿 몸을 휘감고는 사뿐한 스텝으로 멀어진다. 이윽고 한 쌍의 남녀가 좁은 바의 가운데로 걸어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흑백의 바닥과 목조 가구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여성 댄서의 붉은 드레스는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끌었고 또 매혹적이었다. 함께 스텝을 밟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고, 뒤로 쓰러질 듯 기울었다가 다시 일어서서 눈을 맞추고.

 문득, 렌이 내 손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를 돌아보았다. 은은한 조명이 그의 머리 위로 흘러내려서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선율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푸른 눈은 나를 비추었다. 가만히 그의 손을 맞잡고 깍지를 꼈다. 탱고의 선율을 따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그날만 탱고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댄서의 숨소리가 들리는 좁은 바에서의 탱고 공연을 시작으로, 커다란 극장에서 위엄있는 형식이 갖춰진 탱고 공연을 보기도 했고 노천 시장을 걷다가 앉은 식당에서 펼쳐지는 흥겹고 자유로운 쇼를 보기도 했다. 가능한 모든 종류의 탱고를 보고 듣고 기억하고 학습하기 위해 애썼다. 우리는 하늘 아래 똑같은 무대란 없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이 모든 선율을 잔뜩 안고 돌아간 뒤에 우리만의 것으로 변주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나를 워커홀릭이라고 놀렸지만, 설레는 것은 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S#5. 렌의 회상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낮)

 이방인이 되는 것이 두렵지 않아서 좋아.

 그런 말을 했었던 것도 같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도착하면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길을 잃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길을 잃는 것은 곧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것이며, 모르는 골목을 누비는 일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아 한 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나의 세상이 점점 넓어진다.

 한때는 아는 세계가 넓어질수록 그 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내가 더 외로워질 것 같아서 일부러 발을 내딛기를 꺼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넓어진 자리에는 그 공간을 채우는 새로운 만남이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 더는 무섭지 않게 되었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사람과 건물, 골목과 광장, 음식과 기념품, 만남과 이별, 때로는 피로와 헤맴까지도 여행의 향신료가 된다.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인생은 금을 밟으면 지는 경기가 아니라 자꾸만 금을 넘어서 경계를 넓히는 땅따먹기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동안 헛발질했던 것을 메꾸고 싶었기에 더더욱 자주, 멀리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시의 랜드마크인 오벨리스크의 사진을 찍어보내고, 도착하면 그 앞에서 만나자고 문자를 보낸 후 호텔로 돌아갔다. 아야메는 꼬박 하루에 걸쳐 올 것이었으므로 그동안 혼자서 도시를 둘러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기왕 둘이서 하는 여행이라면 새로운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라는 이름은 본래 '맑은 하늘', '순풍'을 뜻한다고 들었다. 그 이름이 붙여졌을 무렵에 비하면 당연히 훨씬 나쁜 공기겠지만, 그래도 물감을 짜둔 것처럼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그를 떠올렸다.

 태평양을 가로질러, 하늘을 날아서, 네가 나에게로 오고 있다.

 아야메를 기다리면서 그의 생각을 하는 시간조차도 내겐 사랑스럽게 느껴지므로 여행의 첫날 일정은 그거면 충분했다.

S#6.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를 세로로 횡단하여 내려가면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작은 도시가 있다. 남극을 제하면 인간의 발로 닿을 수 있는 땅 가장 끝자락에 있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그 도시에는 세상의 최남단에 세워진 등대가 있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보러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세 시간 반을 가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거절해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아야메는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어쩌면 세상의 끝 바다라는 점이 그를 사로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는 요코하마 앞바다를 세상의 끝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있는 힘껏 뛰어서 도망쳐 나와도 결국 해안과 맞닿은 공원의 펜스에 가로막혀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없었던 내가 있었다. 그 앞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다가 오래된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훔쳤던 내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가을장미가 아름답게 필 무렵 공원에 들렀을 때, 높게만 느껴졌던 펜스가 이제는 내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름에 다 꽃피우지 못한 장미는 조금 늦게, 가을에 활짝 피어서 제 미모를 자랑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차갑고 삭막했던 바다는 의외로 푸르게 빛난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저것 변하는 법이다. 익숙할 터인 풍경이 새롭게 보이고, 예전보다도 훨씬 반짝인다. (*)

 그리고 시간이 내게 가져다 준 또 한 가지.

 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웅크리고 있었던 내 손을 잡고 일으켜서, 저 바다 너머에도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수평선 너머를 가리키던 손가락이 있었다.
 너의 손을 잡으면 발을 뗄 수 있다. 그게 어디라고 해도 무섭지 않다. 내가 혼자서도 훌쩍 떠날 수 있는 건 네가 등을 밀어주었기 때문이라는 걸 너는 모른다.

 그러니까, 훨씬 더 멀리에 있었던 진짜 세상의 끝을 함께 보고 싶었다. 이번엔 내가 너의 손을 잡고.

S#7. 세상의 끝

 마침내 도착한 세상의 끝,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주저앉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평선만을 바라보았다. 저무는 노을이 바다를 우리의 색으로 물들였다. 자줏빛 구름이 오렌지빛 태양을 감싸안고 바다 아래로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손끝이 서로 닿았다.

 세상의 끝에서, 우리는 입을 맞췄다.

S#8. 일본, 도쿄

 주어진 시간 안에 일정을 꽉꽉 채워넣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이튿날 아야메는 피로가 뒤늦게 밀려온 탓에 반나절 내내 비몽사몽한 상태로 지냈다. 눈을 자꾸만 비비면서 애써 정신을 차리고 밀린 서류를 읽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으며 커피를 내려다 주었다. 아이스 커피를 받아든 아야메가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올 곳이 있어서 좋네."

 "새삼스럽게?"

 "새삼스럽게."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멀리 떠났다가도 결국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떠나기 전보다 더 넓어진 세상 속에서 우리는 다시 노래를 만든다. 둥근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사랑을 전하고 다시 여기로 돌아올 노래를 부른다.

*"해피 투게더(1997)"

*@Ren_J_SH 2019.09.28일자 트윗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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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사람이 연인이 되기 전의 갈등은 선명한데, 연인이 된 후에도 모종의 이유로 갈등이 생길지? 생긴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지?

우선 1번 질문에 대한 리딩입니다:
두 사람 모두 열정과 욕심이 많은 커플이에요. 두 사람은 함께임에도 함께일 수 없었던 시절을 지나, 지금 현재에 도달했어요. 현재를 ‘도피’ 시점으로 잡았더니 가질 것은 다 가졌으나 만족하지 못 하는’ 카드가 나왔네요.

저... 여기서부터 헉했는데... 둘만의 낙원을 찾아서 도망쳤지만 음악에게서도 도망친다면 두 사람은 절대 만족스러운 삶은 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결국 꿈과 음악과 사랑이 공존하는 곳으로 돌아오는 것까지 합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거고... 그런데 그걸 딱 집어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맺어진 뒤의 두 사람에게 벌어지는 갈등은 대체로 ‘너무 사랑해서’ 벌어지는 일들이에요. 상대를 너무 생각함으로써, 정작 상대를 생각하지 못 하게 되는 모순이요. 렌은 아야메가 자신에게 늘 확신을 가져주기를 바랄 테고, 아야메는 렌이 좀 더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자신의 마음을 살펴봐주기를 바라고 있을 거예요.

아니이ㅠㅜㅠㅠㅠㅠㅠ 트로메라잖아요... 「君無しではいられない」...... 널 너무 사랑해서 생기는 고통마저도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걸 떠올리면 아프지 않은......

게다가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계속해서 자기를 향한 확신을 바라는 렌... 그 격정적인 마음을 알고 사랑하지만, 조금 더 섬세하게 나를 봐달라고 요구하는 아야메의 마음은 이번에 처음 알게된 것 같은 기분인데, 과연 그럴 수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오히려 넘쳐서 큰일인 친구들이니까요.
(트로메라의 컨셉을 말씀드림) 으아아 맞아요ㅠㅠㅠㅠㅠ 그게 꼭 두 사람의 테마 같은 느낌이에요. 너무 사랑해서 아프다니 정말 두 사람에게 꼭 맞는 문구네요 ㅠㅠ)9 그걸 기뻐한단 것 마저도요

하...... 어쩌면 좋을까요...... 저는 얘네가 되게 건강한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서로에게 의존하고 깊고 무거운 마음도 갖고 있었단 거예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결국 아야메의 폭발(!) 그리고 도피(!) 이후 두 사람은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이룬 것 같아요. 결국 도달하는 두 사람만의 왕국에서 오래 행복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렌아야는 그 깊은 사랑에 빠져 죽지 않고 서로를 지탱하면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친구들이니까! 트로메라 무대의 이야기와는 달리 두 사람은 결국 비극을 피해 도망치고 오래도록 행복한 결말을 맞겠죠... 



그리고 2번 질문인데요...

카드만 보면 전체적으로는 굳이 두 사람이 싸울까? 싶은 카드들이 주로 나왔어요. 오랜 갈등의 시기를 거쳐온 만큼 행복할 때만큼은 확실히 행복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중략) 다만 연애 이후의 갈등은 조금 더 잔잔하게, 하지만 깊게 고민이 될 법한 것들에 가까운 것 같아요.

렌은 아야메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어요.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인정한 이후론 저돌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중략) 하지만 이런 강한 열정이, 아야메를 향한 감정이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를테면, 지금 카드에서 보이는 갈등은 이런 모습이에요: 아야메가 고민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걸 바쁜 렌에게까지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혼자 해결을 해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 마음 고생이 날로 심해졌고, 결국 렌은 그 얘기를 아야메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해듣게 되는 거예요. 렌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야메가 자신에게 그런 얘기조차 하지 못 함에 상처 받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이걸 읽자마자 이마를 퍽퍽 쳤는데.........🤦🤦🤦🤦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인데 내가 왜 이걸 생각 못했지? 싶고 캐해석 진짜 완벽하지 않나요... 자기한테 말하지 않은 것에 화난 게 아니라 그만큼 믿음직한 상대가 되어주지 못한 자기한테 화가 난 게 너무 렌이라서ㅠㅠ나보다 상대를 먼저 두는 헌신적인 사랑을 하고 그게 자기를 깎아먹어도 개의치 않는 렌이 너무 좋고 마음 아프고... 하지만 그런 렌을 붙잡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혼내줄 아야메가 있으니까 오늘도 안심입니다...

아야메는 늘 렌을 품어주는 사람이에요. 렌의 상처와 아픔, 콤플렉스, 소망 같은 것들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야메고요. 그런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아야메가 팔을 활짝 벌리고 있고, 그 안으로 렌이 뛰어들어가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거 진짜 눈물나요 요즘 렌이 늘 하던 말 있잖아요 「オレが生まれた意味をキミが教えてくれた」이거... 딱 그 문장이 생각나고... 

아무래도 여기에 들어가야 할 이미지인 것 같아서... 티스토리로 옮기면서 추가해둡니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야... TT

이런 아야메는 자기가 가진 마음에 비해서는 상당히 절제를 잘 하고 있던 편이에요. 마음이 앞서 달려나가는 걸 주변 상황에 맞춰 적절히 조절하고 있던 것 같아요. 우선 렌의 마음을 받아주기 위해서도 그랬구요, (두 사람 모두 달려나갔다간 크게 부딪히겠죠) 아이돌이라는 렌의 직업 때문에도 그랬어요. 그런 만큼 오래 참아온 아야메가 폭발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겠죠.

*노래의 왕자님 드림 온라인 온리전 "Carol of Prince"에 제출했던 작품입니다.

"진구지 씨, 크리스마스 이브에 뭐해요~?"
"아아, 선약이 있어."

내 대답에 실망한 듯 입을 비쭉 내미는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웃었다. 그녀가 애교섞인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붙잡고 다시 질문했다.

"누구랑?"
"그건 비밀."
"에~ 아무한테도 안 말할 테니까, 알려주면 안 돼요?"
"그렇게 근사한 상대가 아니라서."

이번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나도 차라리 너랑 보내고 싶어. 이것만은 진심이야. 그런 소리는 내뱉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기에 그저 싱긋 웃으며 그 자리를 빠져나올 뿐이었다.


시끌벅적한 파티홀 한 구석에서 캐롤을 부르는 소프라노의 노랫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유리잔끼리 쨍강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허공에 울리고 구두 굽이 대리석에 부딪히는 소리는 바닥에 올렸다. 높다란 돔 모양의 천장은 유리로 되어있어서 밤하늘이 보이지만 당연하게도 도쿄의 하늘은 별 한 점 없는 까만색이고, 이 밤에 낭만을 더해줄 눈꽃은 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천장 한가운데에는 근대 유럽의 궁전에 달려 있을 법한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빛을 발했고, 그 아래에는 샹들리에에서 흘러내리는 빛을 모조리 반사해 탐욕스럽게 빛나는 금빛 샴페인 타워가 우뚝 서 있었고, 그 앞에는 내 형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하게 고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여럿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사업 얘기가 잘 되어가는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꽉 죄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려고 매듭에 손가락을 걸었다가 곁에 서 있던 죠지에게 손을 붙잡혔다. 나는 그를 쏘아보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포기한 채로 한쪽 벽에 삐딱하게 기대서자 똑바로 서라는 핀잔을 들었다.

"죠지까지 이러기야?"
"어른스럽게 행동하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만, 이런 자리에서는 그냥 얌전히 있도록 해라. 너도 눈에 띄고 싶지 않잖아."
"…쳇."

혀를 차며 자세를 고쳤다. 여전히 형 쪽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옆에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미성년자에게 음주는 금물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리기에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샴페인을 마시고 싶은 것은 아니고, 목이 마르긴 하지만 대충 물로 축여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파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은 다년 간의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자정을 넘어서도 한참 이어지겠지. 그런 비관적인 예측을 내놓았을 때, 샴페인 타워 앞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그들 부자의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려 했는데, 어쩐지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금빛을 후광처럼 업고 그의 아버지 곁에 서 있는 소년을 뚫어지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소년에게 그 자리가 제법 어울리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아버지가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는 틈을 타 소년은 샴페인 타워를 신기한 듯이 올려다보며 흰 테이블보를 쓰다듬었다.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향수와 충동에 휩싸인 채 작게 속삭였다. 그래, 엎어버려. 마사토. 

그러나 한때 나와 함께 파티 홀을 빠져나가곤 했던 동지는 그 자리에 없고, 대신 그에게도 잔을 권하는 어른에게 손사래를 치는 소년만이 있었다. 그 모습까지 보고 난 후에야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아주 잠깐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도 들지만, 이제 와서 그랬다 한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나서 일순간,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밤하늘에 별이 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한번 깜박이자 그것이 은실에 촘촘히 엮인 크고 작은 조명이 발하는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따금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모습은 하늘에서 반짝이던 별이 눈꽃이 되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광경에 마음을 빼앗겨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답답했던 숨통이 아주 조금 트였다. 조금 가벼워진 머리로, 시끄러운 웃음소리와 번쩍거리는 조명이 춤추는 어지러운 실내와 고요한 겨울밤의 공기가 맴도는 평화로운 바깥이 겨우 유리창 하나로 나뉜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쯤 저 너머로 나갈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떠올리고 어항에 갇힌 물고기라도 되는 것 같다고 자조했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젖을 정도로 그날 밤 본 일루미네이션은 아름다웠다고, 지금도 단언할 수 있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라, 진구지."
"……응?"
"그러니까, 아까부터 나를 왜 그리 빤히 보고 있냐고 묻는 거다."
"내가 그랬나?"

뻔뻔스레 어깨를 으쓱해보았지만 그에게 통할 리가 만무했다. 여전히 나를 추궁하는 파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어쩔 수 없이 생각하고 있던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냥… 신기하다고 생각해서."
"무엇이?"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저쪽 빌딩의 파티홀에서 서로 노려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이쪽 방송국에서 같이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잖아."
"음, 확실히 그렇군, 앞날은 한치도 알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말은 똑바로 하도록 해라. 그때도 지금도 네놈이 일방적으로 노려보고 있지 않나."
"예, 예. 그런 걸로 하자."

말싸움이 길어지기 전에 어영부영 마무리 짓자,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단단한 손이 어깨 위에 얹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쪽을 돌아보자 미간을 한껏 구긴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무대 올라가기 직전까지 싸움이냐?"
"죄송합니다, 쿠로사키 선배!"
"우리 나름의 커뮤니케이션이야."
"둘 다 쓸데없는 데에 힘 빼지 말고, 무대에만 집중해."

나와 히지리카와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깨에 놓인 손이 한번 힘을 꽉 주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가자."

그 한 마디로 단숨에 주변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관객들이 환호성으로 먼저 무대에 올라가 있던 이들을 배웅했다. 그러나 란쨩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는 찰나에 함성은 우리를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눈을 감았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고 다시 눈을 떴다. 어두운 무대 위에서는 관객석의 팬라이트가 내뿜는 불빛이 무엇보다도 밝고 선명하게 보였다. 몇 년 전 오늘에 봤던 것과 비슷한 은빛 파도가 무대를 감싸고 있었다. 저들의 눈에는 나 또한 그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보일 거라고 생각하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이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무대에 서서 자세를 바로잡고 숨을 가다듬는 이 순간, 나는 살아있다.

이전부터 쭉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리프트를 타고 사라지거나 스탭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오면 끝나는 일이지만, 팬들은 어떤 마음으로 공연장을 나서는 걸까? 왠지 모르게 알 것도 같았지만, 오늘에야말로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어서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도 대기실로 가지 않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란쨩과 히지리카와가 먼저 대기실로 돌아가고 스탭들이 뒷정리를 하기 위해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내내 나는 혼자 관객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는 뒷모습들을 보면서, 마침내 나는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도 나와 같이 기쁨과 흥분과 약간의 아쉬움을 안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면서, 그런데도 못내 아쉬워서 조금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무대를 등지고 공연장을 나서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것을 섭섭해하는 동시에 그 꿈을 양식 삼아 다시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들에게, 최대한의 사랑이 담긴 최고의 꿈을 보여주고 싶다고 새삼스레 생각했다.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들떠있는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러나 막상 이백 석 남짓한 관객석이 텅 빈 것을 보자 이유없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 또한 다음 공연을 위한 준비라는 걸 알아도, 몇 시간 뒤면 다시 밤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로 저 자리가 채워질 것을 알아도 막을 수 없는 공허감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애써 떨쳐버리고, 이 이상 깊이 빠져들지 않기 위해 그곳을 빠져나오려던 찰나 나를 멈춰세운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조명 다시 켜주세요. …잠깐, 오른쪽만 켜볼까요."

아무도 없다 생각한 관객석에는 딱 한 사람이 남아있었다.

"음… 너무 세지 않나요? 앞줄 관객들은 눈부셔서 잘 안 보였을 것 같은데?"

기술팀과 함께 조명의 세기와 각도를 연구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빈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타치바나 아야메는 자기가 만든 노래는 끝까지 책임지고 싶다고, 선율에 담은 자기의 마음이 듣는 이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으면 한다고 말하며 무대 연출에까지 참여하는 보기 드문 작곡가였다. 작곡가라면 곡을 써서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그는 충분히 할 일을 완수한 것이고, 그 이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늘 무대 뒤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음향과 무대 장치를 연구하고 구상한다. 다른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도 인정받고 싶은 것도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위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오늘도 관객석과 무대 사이의 통로에 서서 빛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말했듯이 내가 정말로 빛이라면, 분명 그녀가 내뿜는 빛을 반사시켜서 빛나는 행성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녀는 나의 태양이고 나는 그녀의 지구인 것이다. 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인 너와 네가 만든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나. 네가 발하는 빛은 내 마음속의 어둠이 나를 쓸어가려 할 때마다 중력이 되어 날 몇번이고 붙잡아준다. 지금도 그랬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편안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무대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야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계단에 걸터앉았다. 다행히도 만족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회의가 그리 길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다 끝났어?"
"어? 언제부터 있었어? 나 기다린 거야?"
"아냐, 그냥 우연히. 빨리 가서 쉬자."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대기실 안 갔어? 밤 공연도 해야 하는데 괜찮아?"
"걱정 마. 사랑의 힘이라면 이 정도쯤이야."
"응, 괜찮은 모양이네. …아, 빨리 가자! 선배가 선물 가져왔을 거야!"
"선배가? 선물을?"

아야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고개를 갸웃할 때, 그녀가 내 팔을 붙잡고 세 사람이 함께 쓰는 오늘의 대기실 쪽으로 이끌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대기실에 도착해서 문을 벌컥 열어젖힌 아야메가 활기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아깐 정신없어서 인사도 못했네요, 낮 공연 수고하셨습니다! 히지리도!"
"아아, 너도 수고했다, 타치바나."
"그래. 고생했다."

우리가 두 사람의 반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아야메는 의자에 앉기 전부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란쨩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무언가 간청하는 듯한 눈빛의 그녀와 눈이 마주친 란쨩이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가방에서 길쭉한 종이상자 두 개를 꺼냈다. 딱딱한 빨간색 종이로 된 상자 위에는 고급 제과점의 상표가 붙어있었다.

"아, 포장은 신경 쓰지 마. 그냥 갖고 오기 그래서 아무데나 넣어온 거다."

고개를 끄덕인 아야메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상자를 열었다. 나와 히지리카와는 영문도 모르는 채 신이 난 아야메와 뿌듯해 보이는 란쨩을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우와아…!"

상기된 얼굴의 아야메가 상자를 열고 감탄을 터뜨렸다. 이어서 몸을 기울여서 상자 안을 들여다본 나도 함께 놀라고 말았다. 상자 안에는 초콜릿 롤케이크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롤케이크가 아니라 유럽 어느 나라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긴, 나무토막 모양의 롤케이크. 나뭇결처럼 세로줄이 그인 갈색 표면에는 윤기가 흘렀고 고루 뿌려진 슈가파우더는 언뜻 나무토막에 쌓인 눈처럼 보였다. 그 위에는 종 모양 아이싱 쿠키도 착실하게 올라가 있어, 제과점 쇼케이스에 전시되어 있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비주얼이었다. 은은하게 감도는 달큰한 향기는 겉보기만 달콤한 빵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려주었다. 초콜릿을 싫어하는 나라도 한 입 정도는 먹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절로 들 만큼 완벽한 자태를 뽐내는 부쉬 드 노엘이었다.

"이거 혹시 란쨩이…?"
"아, 뭐. 그 녀석이 하도 끈질기게 부탁하길래."
"헤헤, 이거 어렸을 때부터 로망이었다구요. 크리스마스에 먹는 부쉬 드 노엘! 고맙습니다, 선배!"
"제빵에도 소질이 있으셨을 줄은…! 역시 쿠로사키 선배, 대단하십니다!"
"무대하고 그렇게 소리치면 안 지치냐…? 그쯤 하고, 빨리 먹기나 하자."

그러고보니 최근 란쨩네 집에 오븐이 생겨서 제과제빵에 취미를 붙였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을 떠올린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아야메는 깔끔한 손놀림으로 어느샌가 일회용 그릇과 포크 세팅을 마치고 컵에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케이크에 곁들일 음료로 커피도 아니고 우유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정말 그녀답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야메가 포크로 케이크를 찍어 크게 한 조각 떼어내어 입에 넣었다. 입에 한가득 든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고만 있어도 달콤함이 퍼지고 행복해지는 기분이라, 미소 지은 입가가 절로 느슨해졌다.

"맛있어?"
"응, 엄청! 아, 렌은 초콜릿 안 좋아하니까…"
"허니가 주는 거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더니 아야메가 케이크 대신 내게 건네주려던 쿠키를 한손에 들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나는 반대편에 앉은 둘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가 포크를 내밀어주기만을 기다렸다. 머뭇거리면서 결국 포크를 내 입에 넣어주는 아야메의 입가에 묻은 흰 크림도 엄지손가락으로 떼어 내 입으로 가져갔더니, 예쁜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그녀의 귀여운 반응을 곁들인다면 초콜릿의 단맛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네. 역시 란쨩은 대단해."
"그, 그, 그렇지?! 쿠키 먹어! 쿠키는 안 달대, 선배가 너 주려고 따로 만든 거래!!"

테이블 너머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아야메의 손에 들린 아몬드 쿠키를 받아서 한입 깨물면 고소하고 은은한 달콤함이 입안에 퍼졌다. 그것이 기분 좋아서 또 웃음이 났다. 그런 나를 아야메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보자 그녀도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속삭였다.

"오늘따라 자주 웃네."
"나는 원래 잘 웃는 사람인걸."
"그렇긴 한데, 조금 달라."

사실 굳이 듣지 않아도 스스로 알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들뜬 아이마냥 사소한 일에도 자꾸만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아직은 조금 낯설고 간질간질한 행복감이 가슴 한켠에 따스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연인과 소중한 동료들과 함께 모여 느긋하게 웃고 떠들면서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그 짧은 휴식이 끝나고 나면 또다시 나를 향한 함성으로 가득 찬 무대가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들뜨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 기분을 말로 전하는 것도 좋지만 노래로, 키스로 전했을 때 나의 사랑스러운 뮤즈는 더욱 기뻐할 터였다. 하지만 과연 나라고 해도 그 두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입 맞출 수 있을 만큼 용감한 사람은 아니라서, 후자는 라이브를 무사히 끝낸 뒤 서로에게 주는 보상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러면 내게 남은 것은 오로지 노래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니 아야메의 선율에 내 목소리를 입혀서 관객에게 전하기 위해 나는 또 한번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설령 관객이 없는 무대에 오르게 되어도 그녀만은 끝까지 그자리에서 나를 비춰줄 것을 알기에 두렵지 않았다.

"저기, 렌. 돌아가는 길에 잠깐 다른 데 들려도 괜찮을까?"
"응, 얼마든지."
"렌도 피곤할테니까 잠깐만 들렀다 가자. 요 근처야."

그렇게 말하며 핸들을 돌리는 아야메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가끔 보면 나보다도 운전을 잘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큰길에서 꺾은 뒤 근처 옥외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려서 잠깐 걷는다. 새벽 1시를 향해 가는 거리는 차 한 대도 다니지 않아 고요하고, 어느샌가 조용히 내리기 시작한 눈이 보도블록 위에 살포시 덮인다. 그리 많이 내리는 것은 아니라서 내일 아침이면 젖은 자국만을 남기고 녹아버리겠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은 너를 닮았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하지만 강하게 모든 것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눈꽃이 가로수 위에 내려앉는다. 은빛 전구를 동화 속 공주님의 드레스처럼 두른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의 끝에는 눈사람 모양 조형물과 반짝이는 시계탑, 그리고 눈부시게 치장한 트리가 서있다.

아야메가 나를 지나쳐 몇 발짝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녀가 빙그르르 몸을 돌리자 비단실처럼 찰랑이는 자줏빛 머리칼이 날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그녀가 내뿜는 숨은 얼어붙어서 입김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별 한 점 없을 터인 도쿄의 밤하늘이 어째서인지 환하게 밝아오기 시작한다.

"여기, 꼭 와보고 싶었어."

별빛을 품은 두 눈동자가 곱게 휘어진다. 성탄절 밤에 맴도는 모든 환희와 축복을 끌어모아서 사람으로 빚는다면 이런 모습일까? 그녀가 달려나간 자리에 남은 발자국에는 수선화가 피고, 그 뒤를 따라 작고 예쁜 날개를 팔랑이는 아기천사가 나팔을 불며 순록이 끄는 썰매를 인도한다. 교회의 종소리 대신 그녀의 목소리가 탁트인 거리에 맑고 명랑하게 울려퍼진다. 바다를 좋아하는 그녀의 손끝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서 일루미네이션이 만들어내는 빛의 파도가 일렁인다.

"어린애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크리스마스 날 일루미네이션을 보는 것도 로망이었거든. 에헤헤."

그 자리에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코끝과 양 뺨이 찬바람을 맞아 빨갛게 물든 것이 어린아이처럼 사랑스럽다.

"연인이랑 꼭 와보고 싶었어."

그녀가 나를 연인이라고 불러주는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나도 그랬어."
"어, 정말?"
"응. 꼭 보고 싶었어, 이 빛을."

그 언젠가 내가 동경했던 은빛을 너는 이미 넘쳐흐를 만큼 끌어안고 있으니, 어쩌면 내 선물이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내어 코트 주머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낸다. 그녀의 눈동자와 같은 밝은 청록색 상자를 손에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트리를 등지고 선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이건…"
"선물이야. 받아줬으면 해."
"나는 준비 못 했는데!"
"괜찮아,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아야메."

게다가 나는 이미 너무 큰 선물을 받아버렸어. 덧붙이지 않은 한 마디는 흩날리는 눈발에 실어 날려보내고, 아야메의 답변을 기다린다. 그녀가 천천히 포장을 풀고 상자를 열면 안에 든 은빛 목걸이가 옅게 빛난다. 네가 내게 준 빛보다는 한없이 초라한 반짝임이지만, 나의 빛이 네 목덜미에 걸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자수정 펜던트가 분홍색 코트 깃 위에 가지런히 놓인다.

"마음에… 들어?"

내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을 눈치챈다. 답지 않게 긴장한 탓이다. 아야메는 너무도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응! 나 지금 엄청 행복해…! 메리 크리스마스, 렌!"

온통 하얗게 반짝이는 밤에 가장 찬란한 은빛 태양이 떠오른다. 그 빛에 눈이 멀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행복하겠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