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쨘, 귀엽죠?"

  뿌듯하게 이쪽을 돌아보는 얼굴은 부드러운 표정 탓에 평소보다도 훨씬 앳되어 보였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어올린 치즈루의 손에서 달랑거리는 것은 그녀가 오늘 낮에 고심해서 고른 열쇠고리였다.

  "그거 그렇게 마음에 들어?"
  "닮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유리로 만든 너구리와 내 얼굴을 번갈아서 쳐다보는 그녀에게 쓴웃음으로 화답하고, "혹시 몰라서 말해두지만, 나는 둔갑같은 거 할 줄 모르니까." 라고 덧붙였다. 작은 가방의 어깨끈에 열쇠고리를 달고서 만족스럽게 웃는 치즈루를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가가 느슨해졌다.

  치르르르, 하고 우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다다미방의 창가에는 살짝 열린 창틈으로 들어온 시원한 밤공기가 감돌았다. 좌식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페트병에 든 녹차를 홀짝이던 나는 건너편에 앉아 핸드폰으로 오늘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치즈루에게 과장된 투로 말을 건넸다.

  "우와아, 완전 지쳤어… 레이쨩 기브기브~"
  "오늘 좀 많이 걷긴 했죠? 미안해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욕심을 부렸네요."
  "엣…."

  예상치 못한 답변에 놀라 잠깐 말문이 막힌 나를 치즈루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 '그것 좀 걸었다고 지치다니, 그래서 콘서트는 어떻게 해요?'가 아니라?"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거예요?"

  말투는 한껏 부드러워졌어도, 나를 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만은 여전했다. 그러고보니 이곳으로 오는 기차에서 그 얘기를 했었지, 참. 기차에서 내리고 나서 신이 난 치즈루의 손에 여기저기로 끌려다니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그 마음은 정말 기쁘지만, 어떤 변화든지 익숙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 이런 나도 이해해줬으면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는 동안, 흥하고 콧방귀를 뀐 치즈루가 옆에 놓여있던 종이 봉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꺼낸 상자에는 '유리의 숲(ガラスの森)'이라는 상표가 붙어있었다. 조심스럽게 상 위에 올려놓은 하얀 상자의 뚜껑을 열자, 이윽고 둥그런 곡선을 그리는 유리 램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돌려 램프의 코드를 꽂는 치즈루의 옆모습에서 그녀가 한껏 기뻐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치즈루는 반짝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나는 아마 전생에 까마귀였나봐요, 라며 농담을 던지던 그녀의 미소가 눈에 선했다. 그래서 레이지 씨를 좋아했나? 라고 작게 덧붙이는 목소리를 떠올리면 조금 쑥스러워졌다.
  그런 그녀가 '유리의 숲'에 발을 들이던 순간, 바닷빛 눈동자가 그 공간에 있는 어떤 유리 세공품보다도 예쁘게 반짝이는 광경을 나는 보았다. 치즈루는 아마도 내가 오르골을 구경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허리를 숙이고 진열대 위에 놓인 제품을 하나하나 정성들여 감상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어떤 노래가 흐르고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와중에 용케도 동료의 부탁을 떠올리고 그의 후배를 위한 피요쨩 오르골을 집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불 좀 꺼줄래요?"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세팅을 마친 치즈루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자, 등뒤에서 작은 탄성이 들렸다. 바로 다음 순간 천장에 비친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까만 천장 위로 푸른빛이 일렁였다. 비슷한 듯 다른 제각기의 색을 뽐내는 유리조각이 불 꺼진 천장을 캔버스 삼아 밀려오는 파도 같은 그물 무늬를 그렸다. 그것은 이내 살랑이면서 햇살을 가리는 나뭇잎의 그림자로 변했다가, 다시 오색으로 반짝이는 인어의 비늘처럼 흔들리기도 했다. 몸을 돌리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연인의 모습이 부드럽게 빛났다.

  "예쁘네요."
  "그러게, 정말 예뻐."

  내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자, 치즈루는 빛을 발하는 램프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그녀가 희고 긴 손가락을 들어 반질반질한 유리의 표면을 찬찬히 어루만지는 광경을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수줍고 조심스러우며 어쩌면 경건하기까지 한 그 행위는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도 보였다. 풀벌레도 잠시 물러가고 시계의 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이대로라면 서로의 심장소리마저 들릴 것만 같았다.

  "우리의 시간도, 분명 이렇게 생겼을 거예요."

  우리가 만난 후로 쭉, 치즈루는 이렇게 다소 두서없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있었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나는 당혹감보다는 이어질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그녀의 눈을 마주봄으로써 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의사를 전하곤 했다.

  "하나만 떨어져 있으면 그저 조금 반짝일 뿐이고, 누군가가 밟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는 유리 조각일 뿐인데."

  기억을 더듬은 끝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나 자신의 목소리였다. 시간의 조각을 모아나가자. 나의 노래를 들어준 소중한 이들에게 바치는 메세지 중 일부였다.

  "그 조각 하나하나가 모이면 이렇게 아름다운 빛이 되는 거예요."

  동화책을 읽어주기라도 하듯, 차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는 치즈루의 목소리가 고요한 방을 가득 채웠다.

  "행복했던 시간도, 슬퍼했던 시간도,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울고 싸웠던 시간도… 그리고 다시 화해하고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이렇게 여행을 오기도 하고… 우리가 쌓아온 시간이 전부 모여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천장을 채운 빛에 가느다란 손가락의 그림자가 진 것이 보였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비추고 있어요."

  나는 다시 치즈루를 보았다. 그녀는 비로소 모든 짐을 내려놓고서 나잇대에 맞는 풋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이지 씨는 지금, 행복한가요?"

  갑작스럽게 날아든 물음이었지만,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랫동안, 나 자신조차 의심했지만 결국엔 거짓이 아니었던 그 진심이 나만의 사랑스러운 이에게 닿을 수 있도록.

  "응, 행복해. 정말, 정말 많이."
  "다행이다."
  "하지만,"

  아직도 램프의 표면을 어루만지고 있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램프가 발하는 열이, 잡은 손의 온기가 전해져왔다.

  "그게 전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는 앞으로 더 행복해질 거야."
  "지금보다 더?"

  그렇게 묻는 치즈루의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처럼 밝았다.

  "응, 지금보다 더. 너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할게."

  그녀가 후후,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약속한 거예요?"
  "그래."

  치즈루의 손을 램프에서 떼어낸 뒤 가지런히 모은 두 손에 공손하게 입을 맞췄다. 곱게 정돈된 손끝에 입술이 닿을 때마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이 감정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치즈루."

  그 세 음절밖에는 없을 것이다.

"곡은 완성됐어요. 가사는… 정말 끝까지 안 알려줄 거예요?"
"아하하…"

툴툴대며 서류를 내려놓는 나에게 그는 멋쩍은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알았어요. 그럼 녹음실도 오지 말라고 할 거죠?"

그가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엔 유한 사람이지만 고집을 부릴 때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한숨을 쉬고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얼마나 대단한 가사를 썼길래 그래요? 실망시키기만 해봐요!"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단언했다. 나는 뭐라 더 불만을 토로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이 확신으로 차있었으므로 그냥 그를 믿고 얌전히 기다려보기로 마음먹고, 기획서를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그럼 다음은 뮤직 비디오 촬영인데요,"
"앗, 그거 말인데, 내가 촬영지를 생각해본 게 있어. 놀이공원은 어떨까?"
"놀이공원?"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있을 건 전부 있는 소박한 놀이공원의 사진을 보여주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응,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놀이공원인데, 어릴 적에 가족이랑 많이 갔었어. 그때도 새로 지은 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꽤 오래된 곳이기는 해."

조곤조곤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즐거움이 묻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편곡할 때 내가 뭐라고 부탁했는지 기억 나?"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고, 나는 입을 열었다.

"꿈만 같은 분위기, 였죠."
"그래, 꿈만 같은 노래. 어렸을 때 나를 반짝이고 황홀한 꿈으로 이끄는 장소 중에 하나가 놀이공원이었거든. 치쨩은 그런 경험 없어? 놀이공원에 가기로 약속한 전날부터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잠들어서, 다음 날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 가방을 싸고 부모님을 재촉하던 경험. "

소풍 전날 들떠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린 그를 상상하며 작게 웃고 있었더니, 말을 마친 그가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급히 표정을 감추고 대답했다.

"가본 적이 많이는 없지만,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어요. 그렇지만… 놀이공원의 꿈만 같은 시간은 조금, 신기루 같지 않아요?"
"신기루?"

그가 되물었다. 나는 그를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네, 신기루요. 어렸을 때 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차 안이 너무 아쉽고 쓸쓸했어요. 너무 금방 꿈에서 깨버린 기분이라서요."

내가 너무 길게 말했나 하고 고개를 흘끗 들어 그를 보았더니, 그는 여전히 턱을 괴고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꿈은 싫어요. 저는 끝나지 않을 꿈을 꾸고 싶어요. 그래서 노래도 그렇게 만든 거예요. 흐릿하고 몽환적인 꿈의 멜로디가 아니라, 화려하고 즐겁게 울려퍼지는 꿈의 멜로디. 당신에겐 그게 더 어울려요."

말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앙되어서 톤이 조금 높아진 모양이었다. 말을 마치자 그는 이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나는 뭐라도 말해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과연, 치쨩은 어릴 때부터 시니컬했구나…."
"…제가 이상한 거예요?"
"아니, 아냐. 나도 그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있지, 정말 그게 다였어?"
"네?"

그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내 눈 앞에 척 가져다댔다. 내가 그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자, 그가 빙긋 웃었다. 

"집에 와서 잠들 때, 과연 아쉬움 뿐이었어?"
"……아뇨. …롤러코스터는 처음 타봤는데 재밌었지, 무서워도 타길 잘했어, 걸어다녀서 다리는 아파도 많이 돌아다니니까 즐거웠어, 그런 생각을… 했네요."

스스로 말하면서 점점 그가 말하고자 한 바를 깨달아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나를 보고 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팔을 거뒀다.

"바로 그거야."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웃는 그를 볼 때면 나까지도 그가 내뿜는 알 수 없는 확신에 휩싸이곤 했다. 그래, 이 사람은 늘 그런 사람이었지. 뭘 생각하는지 통 알 수가 없지만,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면 한번도 본 적 없는, 새로움으로 가득한 세계가 펼쳐진다. 닿지 못할 별에 손을 뻗는 것도 그와 함께라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내밀어진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것뿐이었다.

"…좋아요. 그럼 거기로 할까요."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그의 차에 타고 사이타마의 한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사전 답사-를 가장한 데이트-라는 이유에서였다.

그곳은 확실히 빈말로라도 단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여기저기서 낡은 티가 나는 놀이공원이었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더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누구나 어렸을 적 추억 한켠에 품고 있을 법한 놀이공원 그 자체였다.

사실 낮 동안 우리는 그곳에서 사전답사라고 할 법한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애초에 뮤직 비디오 기획팀과 함께하는 진짜 답사는 내일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가 나를 데려간 것은 확실히 데이트를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나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 또한 그와 데이트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이 없는 놀이공원에서 캐릭터 머리띠를 나눠끼고 솜사탕을 사들고 사진을 찍고 놀이기구를 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진짜 사람이 없네요."
"그렇지? …사실 여기, 곧 폐장할 거라는 소문도 있어. 손님이 별로 안 와서."
"…정말요?"
"응, 하지만 오늘 손님이 없는 건 휴장일이라서야."

깜짝 놀랐잖아요! 라고 핀잔을 주려 했던 내가 고개를 돌리자 노을을 배경으로 선 그의 옆얼굴이 보였다. 필시 어린 날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 그의 표정은 조금 쓸쓸해보였고, 바람이 휭 불고 지나가자 갈색 머리칼이 흔들리는 모습은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말문을 잃은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여전히 내가 아니라 저 멀리에 선 관람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래서 여기로 하고 싶었던 것도 있어.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러워도 나, 나름 인기는 있으니까… 뮤직 비디오 촬영지라고 소문이 나면 여길 찾는 손님들도 좀 늘어나지 않을까 하고."

말을 마치고 작게 웃는 그를 보고, 나는 어쩌면 그가 이 놀이공원에 자신을 비춰보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이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화려한 영광을 누렸지만, 이제 저물어버린 이름을 끌어안고 쓸쓸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이 허물어진 꿈의 성터가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젓고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은 여기서 끝날 만큼 약한 빛이 아니라고. 그 영광을 끌어안고 다시 한 번, 이전보다 더 세게 빛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다행히도 내가 그러기 전에 그는 스스로 빛바랜 추억에서 깨어난 듯했다. 그래도 나는 조금 걱정스러워서, 그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그가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빙긋 웃고 깍지를 껴주어서 조금 기분이 나아진 채로, 나는 관람차를 향해 걸었다.

"마지막은 역시 관람차죠?"
"앗, 우리 통했어!"
"통했네요."

그렇게 손을 잡고 걸어서 관람차 앞에 도착했을 때 즈음엔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는 나를 관람차 앞 벤치에 앉히고 음료수를 사다 주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안 마셔도 되는데…"

원망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려도 보았지만, 그는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캄캄해진 지 오래였다. 돌아오면 잔뜩 혼을 내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던 차에, 등 뒤에서 팟, 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쭉 늘어선 노점과 놀이기구에 먼 곳부터 하나씩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솜사탕 노점은 노란색, 회전목마는 파란색, 인형 노점은 빨간색, 티컵은 초록색… 팟, 팟, 하는 소리를 내며 차례대로 어둠을 밝히는 조명의 행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어릴 적 꿈꿨던 동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아주 가까이까지 조명이 들어왔을 때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커다란 관람차가 빛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관람차의 알록달록한 빛에 시선을 빼앗긴 그때, 근처 스피커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전주. 바로 일주일 전까지도 고쳐쓰고 또 고쳐썼던 멜로디.

마침내 어둠 속에서 그가 나타났다.

"밤하늘에 녹아든 빌딩의 불빛을 쏙 닮은 너의 눈동자는,"

달콤한 노랫소리와 함께.

"어른의 체면을 차리지 않고서는 아무래도 잘 마주할 수가 없어,"

나는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공연용이 아니라서 그리 좋지도 않은 스피커의 음질조차 무시하고,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베테랑의 음색을 뽐냈다. 그뿐만이겠는가, 박자에 맞춰 스텝을 밟고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춤추는 그는 순식간에 관람차 앞의 간소한 대기 공간을 오직 한 명만을 위한 공연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 유일한 관객이 나라는 사실에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진짜 나를 찾아준 너에게 어떤 기적을 선물하면 좋을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절하게 묻는 소절을 듣고 나서야, 내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물이 주르륵 흘러서 옷깃에 떨어진 자국을 보고 깨달았다. 그는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노래할 뿐이었다. 그는 단지 마이크를 들지 않은 쪽 팔을 벌려서, 나는 그것을 품에 안기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그에게로 뛰어들었다. 그의 팔이 품안의 나를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꽉 껴안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꿈이 피어 있어, 가슴 속 깊이에서 빛나는 별처럼,"

그가 가사에 맞춰 한쪽 손으로 밤하늘을 가리켰지만, 나는 빛이 새어 들어올 구멍 하나 없는 캄캄한 도시의 밤의 장막 대신, 지금 내 눈앞에서 무엇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는 나의 별을 일초라도 더 눈에 담을 뿐이었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며 천천히 돌아가는 관람차는 분명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보다는 동화도 신기루도 아닌 꿈을 보여주며 지금 이곳에서 빛나고 있는 그가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가 눈물로 얼룩진 나와 눈이 마주치고 살포시 웃었다. 그를 조금이라도 더 또렷하게 보려고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보았지만, 그럴수록 눈물은 멈추지 않고 더욱 더 흘러내렸다.

"잠든 하트에 사랑을 밝혀서, 그대로 괜찮다고 보듬어주었어."

그를 위해 쓴 노래에 나를 위해 쓴 가사를 붙여 노래하는 이 순간, 그를 향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나는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사랑의 말을 속삭인 뒤 입 맞추고 싶었지만, 아직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 충동을 억누르며 하염없이 울면서 한 소절, 한 장면이라도 더 뇌리에 새기기 위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눈을 부릅떴다.

"순진한 미소에 입맞춤을…"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목소리에 담긴 확신. 지울 수 없는 슬픔이 어려있지만, 그것마저도 너와 함께라면 이젠 괜찮다고 웃는 미소. 나를 믿고 따라와주겠냐고 물으며 손을 내미는 다정한 확고함. 그가 노래하는 꿈은, 그가 보여주고 싶은 꿈은 절대로 신기루가 아니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이름이 무너진 영광의 이름이 아니라 오래도록 밝게 빛나고 뜨겁게 타오른 뒤에 사라질 때마저 화려하게 폭발하여 모두의 기억에 남을 별의 이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누가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마침내 간주가 흘러나오는 동안, 나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던 것을 애써 그치고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서 간신히 질문 하나를 던질 수 있었다.

"나는, 나는… 당신을 꿈꾸게 만들 수 있나요?"
"나는 언제나 네 눈을 보며 꿈을 꾸는걸."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 그가 눈물로 젖은 내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아마도 짜디짠 맛이었을 텐데도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빙긋 웃으며 나를 두 팔로 다시 껴안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가,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둥그렇지만 단단한 회색 눈동자가 여느때보다도 더 상냥하게 휘어졌다.

그날 밤, 빛나는 관람차 앞에서 우리는 키스했다.

키스와 함께 끝나는 결말에서는 보통 걸려 있던 마법이 풀리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마법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꿈의 마법이.

 소파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은 치즈루가 TV를 켰다. 무심하게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손길에 맞춰 휙휙 돌아가던 채널이 어느 한 곳에서 딱 멈췄다. 치즈루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화려한 연출과 함께 나타난 자막을 읽었다.

 생일 기념 독점 취재! 프로페서는 어떤 사랑을 해?

 '마이라스'에서 메인 MC의 생일을 맞아 진행한 듯한 기획은, 평소 레이지가 '사랑의 프로페서'라는 캐릭터로 연애상담을 해주던 것을 뒤집어, 이번에는 프로페서의 사랑 방식을 알아보자는 내용인 듯했다. 란마루와 오토야, 토키야가 판넬에 붙은 스티커를 떼고 나타나는 질문을 읽으면 고깔모자를 쓴 레이지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오토야가 명랑한 목소리로 질문을 읽었다.

 "다음 질문입니다~! '좋아해'와 '사랑해'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질문에 치즈루가 고개를 갸웃했다. 답은 쉽게 떠올랐다. 작년 그의 생일날 올라온 코멘트가 분명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대답을 떠올린 레이지가 빙긋 웃으며 입을 뗐다.

 "란란도 오토양도 톳키도, 지금 이 자리엔 없지만 아이아이도 뮤쨩도! 모두를 정~말 좋아해!"

 레이지가 양팔을 크게 벌리고 활짝 웃었다. 다음 순간,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마이 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려나?"

 목소리를 낮추고 그렇게 말한 레이지가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슬쩍 올려서 카메라를 보았다. 그리고 옅은 미소는 다시 장난기를 띤 아이 같은 얼굴로 변했다.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카메라 앞의 코토부키 레이지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대답하곤 했다.

 치즈루는 애초에 연애금지인 아이돌에게 그런 걸 꼬치꼬치 캐묻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생각했지만,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그 아슬아슬함이 묘미인 거라는 레이지의 설명도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극을 추구하는 대중과 업계를 향한 회의감도 늘었다) 그리고 레이지는 노련한 사람이었기에 이런 주제가 나올 때마다 꼬투리를 잡힐 만한 쓸데없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레이지의 연인은 그런 그를 좋아했지만, 가끔은 서러웠다.

 "내 건데."

 치즈루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의 사랑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좋아해'도 '사랑해'도 미소도 키스도 전부, 내 것이었다면 좋을 텐데. 조금 울적해진 치즈루가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옆으로 스르르 누웠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치즈루는 짧은 잠에서 깼다.

 "다녀왔습니다~ 어라, 웬일로 소파에서 자고 있었어?"

 "아, 오셨어요."

 일어나 앉은 치즈루를 레이지가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치즈루가 밤공기를 묻힌 뺨에 괜히 자기 뺨을 갖다 대고 부비자 레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그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드물게 어리광을 부리는 연인을 마음껏 귀여워해주고 싶었기에 레이지는 자칫하면 화를 부를 수도 있는 장난스러운 말은 삼가기로 했다. 대신 치즈루의 팔에 허리를 둘러 꼭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가만히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치즈루가 홱 고개를 들었다.

 "그렇담 나는 뭐예요?"

 "응?"

 "아까 마이라스 봤어요. 멤버들보다도 후배들보다도 '마이 걸'들보다도 나를 더 좋아하잖아요."

 치즈루가 레이지의 가슴팍을 짚고 몸을 일으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좋아해, 그리고 사랑해. 그 다음에 오는 최상급은 뭔데요?"

 손 아래 놓인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레이지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단어와 문장들 중에서 가장 알맞은 것을 찾기 위함이었다. 치즈루도 얌전히 그를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레이지가 입을 열었다.

 "너와 함께 살아가고 싶어.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네가 곁에 있으면 좋겠어. 내일뿐만 아니라 모레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쭉."

 말을 마친 레이지는 한 손을 들어 치즈루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치즈루는 아무 말 없이 그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무 수수한가? 영문도 모르겠고."

 살짝 긴장한 레이지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덧붙였다.

 마침내 일시정지가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치즈루가 레이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당황한 그의 귓가에 치즈루가 속삭였다.

 "아뇨, 엄청 잘 알겠어요. …좋아요."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레이지는 그것이 못내 사랑스러워서, 하지만 자존심 강한 그의 소녀는 이런 순간에 붉게 물든 얼굴을 절대 보여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입술 대신 새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가느다란 몸이 움찔 떨렸다. 비단실 같은 머리카락을 장난치듯이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레이지는 다시 그를 품에 가두었다. 겹쳐진 심장이 같은 박자로 쿵, 쿵, 하고 뛰었다.

 "치쨩은? 치쨩은 나를 얼만큼 사랑하는데?"

 사랑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레이지가 유치한 물음을 끝내 입에 담았다.

 "레이지 씨라면 내게 뭘 해도 좋을 만큼."

 "그건 너랑 보낸 첫 생일에도 했던 말인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그때부터 이랬나보죠."

 치즈루가 입을 삐죽 내밀자 레이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치즈루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세를 바꿔 그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마냥 들어주고 싶을 만큼. 앞으로 있을 나날을 전부 당신에게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리고 슬쩍 시선을 피하려 했으나 레이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볼을 꾹 잡힌 채로 레이지를 바라보던 치즈루가 눈을 감았다. 레이지는 그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그는 눈꺼풀, 콧잔등, 그리고 뺨으로 점점 내려오면서 부드럽게 쓰다듬듯이 입을 맞추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다시, 치즈루의 입술 위에 자기 입술을 겹쳤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맞은 7월 13일의 이야기.

※'상대방이 원치 않는 신체접촉' 묘사가 있습니다. 올스타 레이지 루트 챕터2의 스포일러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주의해주세요.

 하얀 손가락이 플라스틱 빨대를 집어 음료수를 휘젓는다. 레모네이드 잔 속의 얼음이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7월의 날씨에도 이 카페는 테라스석에 앉아야 온 보람이 있다면서 굳이 야외를 고집한 치즈루는 별로 더위를 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건너편에 앉은 내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한가하시네요, 언제나.”
 “언제나 그런 건 아냐~ 오늘은 운이 좋았지.”
 “하루가 통으로 비어있는 아이돌이라니, 위험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휴가래도….”

 블루 레모네이드보다 조금 더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속내를 캐내려는 듯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정말 그게 다예요?”
 “응?”

 나는 괜히 놀라서 되묻는다.

 “귀중한 휴가를 나랑 이렇게 보내도 괜찮은 거예요?”
 “치쨩이 뭐가 어때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치즈루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그녀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이, 나는 조각 케이크의 한 귀퉁이를 포크로 베어먹는다. 치즈루는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나에게서 오늘 만남의 목적을 알아내기를 포기한 기색으로 넌지시 말한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당신은 나를 잘 아는 것 같은데 나는 당신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짜증나요."

 나는 늘 그랬듯 웃음으로 얼버무리려다가 이어진 말에 뒷덜미를 잡힌다.

 “그러니까, 지금 알아가기로 하죠.”
 “뭐?”
 “이름, 연령, 직업… 정도는 알고 있고, 그럼, 글쎄… 혈액형?”
 “의미 있는 거야, 그거?”
 “혈액형은?”
 “B형입니다….”
 “키와 체중?”
 “키는 173cm, 체중은 프라이버시라서 비밀!”
 “아, 예.”

 갑작스럽게 시작된 문답에 내 나름대로 응수하기 시작한다. 이유는 잘 몰라도 언짢아진 듯한 그녀의 기분이 이렇게 해서 풀린다면 다행이지 않은가. 잡지 인터뷰 같은 질문을 몇 개 쏟아내던 치즈루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윽고 묻는다.

 “생일은?”
 “……7월 13일. 참고로 게자리야.”

 여름의 테라스에 침묵이 감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도, 흰 목덜미에 착 달라붙은 긴 생머리도, 혹시 자신이 잘못 안 게 아닌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눈동자도, 얼음이 녹아서 땀을 흘리는 레모네이드도 전부 새파란 색이다. 더위에 색을 칠한다면 역시 코발트 블루가 좋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소녀의 목소리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떨어진다.

 “오늘이잖아요!!”

 사건의 발단은 몇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목덜미에 착 달라붙는 아침이었다. 여느 때처럼 울리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끈끈함을 얼른 벗어던지고 싶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욕실로 향하던 차에, 전자시계에 떠오른 숫자를 보고 멈춰섰다. 눈을 비비고 또렷해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7/13'이라는 날짜였다. 요근래 드물게 스케줄이 없는 날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모처럼 깊게 잠들었기 때문에 오늘 날짜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일이라고 들뜰 나이는 진작에 지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축하를 받는 게 기쁘지 않은 건 아니다.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수많은 문자들을 보며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가는 것을 느끼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늘어선 축하의 글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확인과 답장이 끝나갈 무렵, 문득 기다란 대화 목록에서 보이지 않는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대화방을 열어보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만이 떠올라 있을 뿐, 상대가 보낸 문자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문자를 입력한다.

 [치쨩 오늘 시간 있어?]

 머지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네]

 그 짧은 대답이 얼마나 기쁘던지.

 [그럼 데이트 할래?]

 데이트, 하고 적기는 했어도 보통 떠올리는 연인 사이의 랑데뷰는 전혀 아니다. 둘이서 바다에 다녀온 날 이후로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부쩍 내게 마음을 연 것처럼 보이는 치즈루에게 장난으로 그렇게 말했더니, 잠시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더니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요?”라고 자연스럽게 대답하기에, 그날 이후로는 쭉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뿐이다.

 [가보고 싶었던 카페가 있어요]

 첨부된 주소를 검색하면서, 그녀가 일부러 축하를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생일을 몰랐을 뿐이라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내가 직접 물어본 것도 그녀가 말해준 것도 아니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기분이 좋아진 나는 휘파람을 불며 나갈 준비를 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왜 말 안 했어요?”

 “부담스러워할까 봐……? 치쨩, 아까도 휴일에 자기랑 있어도 되는 거냐고 물었고.”
 “그건….”
 “그런데 생일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면, 더 싫어할 줄 알았어.”

 전부 사실이다. 우리의 나들이는 어디까지나 ‘남는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시간을 내어서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그러나 언젠가부터 빡빡한 스케줄 사이에 일부러 빈 공간을 넣어서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은 내가 있다. 하지만 분명 치즈루는 그것을 싫어할 테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다.

 “……레이지 씨는, 바보네요.”
 “응?”

갑작스러운 매도에 벌받는 아이처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새삼스러운 사실을 저도 모르게 말해버렸어요. 자, 가요!”
 “자, 잠깐만, 어디를?”
 “어디든!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생일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소녀의 눈빛은 무척이나 올곧고 굳세어서, 감히 거역할 수가 없는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응, 고마워.”

 아오바 치즈루는 표현하는 것이 조금 서투를 뿐, 근본은 착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 까칠까칠한 상냥함에 깜박 기대고 싶어질 만큼.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어도,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아무리 다니는 사람이 적은 평일 한낮이라고 해도 아이돌이 이성과 다니는 모습이 들켰다가는 큰일이지, 하고 반 농담 반 진담을 던졌더니, “그러면 저를 불러낸 것부터가 잘못이잖아요.”라는 정설을 내뱉어 버리기에, 쓴웃음을 짓고 운전대를 잡았다.

 한적한 공원의 유리 온실을 산책하고, 골목 구석에 있어 유명하진 않지만 단골이 많은 모자 가게를 구경하고, 잡화점에 들러 세차와 서핑보드 관리에 사용할 왁스를 샀다. 그녀는 한 발짝 뒤에서 나를 따라다니다가 가끔 앞으로 나서서 내게 무언가 질문하곤 했다. 꽃은 좋아하세요? 이거랑 이거 중에 어떤 색이 마음에 들어요? 그건 어디에 쓰는 거예요? 꾸준히 날아드는 사소한 질문은 그녀 나름의 배려이고 호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차에 올랐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 치즈루가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 나는 자연스럽게 저녁을 어디에서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생일이니까 조금 호화로운 곳에 데려가도 괜찮을 터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후보들 중 하나를 고른 뒤 핸들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내가 가게에 전화를 걸어 예약하는 동안 치즈루는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방까지 안내해준 직원이 깍듯이 인사하고 문을 닫고 나가자 치즈루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예약한 곳은 레스토랑에 가까운 고급 가라오케로, 치즈루는 이런 곳에 와본 경험은 처음인지 신기한 눈빛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야경을 등지고 흰 소파에 앉았다. 메뉴는 들어오면서 카운터에서 주문해두었으니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맞은편에 앉은 치즈루가 손에 무언가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크고 넓적한 리모컨이었다.

 “가라오케 기계도 있네요?”
 “그야, 가라오케니까.”

 치즈루가 손에 들린 리모컨과 나를 번갈아 흘깃 쳐다보았다. 흥미가 있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면, 이 애는 여느 십대 소녀들처럼 친구들과 우르르 가라오케로 몰려가본 적도 거의 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부르고 싶으면 불러도 돼. 아니면 음식부터 먹어도 되고.”

 “음… 역시 밥부터 먹을게요.”
 “그래, 그래.”

 치즈루가 리모컨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두꺼운 책을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나는 수록곡 목록을 뒤적이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근데 치쨩은 가요 듣던가?”
 “당연하죠.”
 “그랬어? 관심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째서요? 당신 노래를 다 꿰고 있는데도?”
 “…그건 그렇네.”

 병실에서 흰 커튼 너머의 햇빛을 받으며 조용히 책을 읽던 이미지가 너무 선명했던 나머지, 멋대로 클래식만 즐겨듣는 어린 예술가라고 생각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이돌이나 가수, 밴드의 음악도 두루두루 듣는다고 말했다.

 “당신 사무소에서는 쿠로사키 란마루의 곡도 좋아해요.”
 “음, 란란은 멋지지~! 다음에 소개해 줄까?”
 “아뇨, 됐어요. 락스타는 최대한 멀리서 볼 때 가장 멋있거든요.”
 “아아, 알 것도 같고…….”

 우리 사무소의 아이돌과 그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음식이 도착했다. 안심 스테이크와 샐러드, 스파클링 사이다가 둘 앞에 각각 놓였다.

 끊이지 않는 잡담을 곁들인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마이크를 잡은 치즈루의 첫 선곡은 의외로 최신곡이 아니었다. 이제는 원로라고 불리는 여가수가 젊었을 적 불러 대히트를 친 슬픈 음색의 이별 노래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처음 안 사실이지만, 치즈루는 노래를 제법 잘 부르는 편이었다. 구슬픈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무감정한 얼굴의 갭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기는 했지만. 노래가 끝나고 나는 신나게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브라보~! 그대로 데뷔해도 되겠어! 나랑 듀엣하지 않을래~?”

 노래하는 내내 무표정했던 그녀가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그리고 두꺼운 책과 리모컨을 내 앞으로 쓱 밀었다.

 “이제 레이지 씨 차례예요.”
 “나도 부르는 거야?”
 “당연하죠.”
 “그럼 사양하지 않고!”

 책은 열어보지 않고 곧장 리모컨을 들었다. 외우고 있는 번호를 빠르게 입력한 뒤 ‘시작’ 버튼을 누르면 곧바로 전주가 흘러나왔다. 자기 노래를 고르는 건 치사하다고 하려나? 하지만 흘끗 본 치즈루는 두 손을 모으고 내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한테 반하면 안 돼요, 아가씨!”

 고전적인 멘트를 외친 뒤 몇 번이나 불렀던 익숙한 러브송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좁은 건 아니었지만, 과연 이런 장소에서 전력을 다해 춤을 추는 것도 우스운지라 큰 움직임은 적당히 생략한 안무를 소화하며 노래를 불렀다. 치즈루가 고개를 까닥이며 호응해주었다. 노래가 끝날 무렵 나는 그녀에게 손가락총을 겨누었다가, 마지막 소절을 끝내면서 빵! 하고 쏘았다.

 “어땠어, 내 노래?”

 “멋졌어요.”

 방심한 사이 튀어나온 솔직한 감상에 잠시 대답할 말을 잊었다.
 반주가 끊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작게 박수치는 치즈루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그런 내 행동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변명하듯 말했다.

 “듀엣 부를 거면, 나란히 앉는 게 좋지 않겠어?”
 “…마음대로 하세요.”

 내가 요즘 유행하는 남녀 듀엣 아이돌송을 선곡해도 치즈루는 말리지 않고 저쪽에 놓인 여분의 마이크를 들 뿐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오늘 하루 동안 어떤 제안을 하든지 받아줄 작정인 것 같았다.

문득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 내보인 뾰족한 가시는 보호 기제였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번 마음을 열면 이렇게까지 스스럼없이 들여보내주는 줄은 몰랐다. 그녀는 나를 믿고 있었다.

 그러니 늦은 시간까지 단둘이 이런 곳에서 나란히 앉아 저녁을 먹을 수 있었고, 끝나면 내 차를 타고 돌아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겠지.

 나 같은 남자의, 무엇을 믿고, 너는, 나를.

 “레이지 씨?”

 치즈루가 노래할 부분이 시작되었음에도 마이크를 들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온종일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만 했는데, 싫지 않았어?”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치즈루가 마이크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싫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만 한 것도 아녜요. 나도 즐거웠고. 무엇보다도 시작은 내가 한 거잖아요. 레이지 씨의 생일인데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질 못했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거절도 해야 하는 법이야.”
 “…별로 거절하고 싶지 않은걸요, 당신이 하는 부탁은.”

 정적이 찾아든 방에 원곡을 가늠하기 힘든 가라오케 반주만이 시끄럽게 흘렀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야경의 불빛이 흐려졌다. 다음 순간, 나는 치즈루의 어깨를 쥐고 그녀를 소파 위로 넘어뜨리고 있었다.

 쿠당탕,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마이크가 날카로운 경고음을 울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두 손목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려 한 손으로 쥐었다. 검은 가죽 소파 위로 비단실 같은 긴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치즈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봐, 말했잖아. 함부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손에 잡힌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놓인 치즈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이상 있다가는 농담으로 끝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빨리 이 손을 놓고, 다시 웃으면서, ‘무서웠어? 장난이야. 나쁜 장난이었지, 사과할게. 이제 알겠지, 너는 나를 거절할 필요가 있어’… 이런 말을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손에서 힘을 푼 순간, 치즈루가 소리쳤다.

 “웃기지 말아요! 이제 와서 목소리를 깔고 나쁜 사람인 척해 봤자 하나도 안 무서워요! 그 울 것 같은 표정부터 어떻게 하지 그래요?”

 그녀가 내 손을 뿌리친 뒤 소파를 짚고 몸을 일으켜 내 밑에서 빠져나갔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서는 이상하게도 원망이나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이라고?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밤하늘 위로 떠오르는 얼굴이 야경에 흐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치즈루가 그런 나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미안해.”
 “사과는 됐어요.”
 “그래도 미안해. 온갖 어른스러운 척은 다 해놓고서… 최악이지, 나.”
 “알면 됐네요.”

 치즈루가 블라우스의 소매를 끌어내려 손목을 감췄다. 긴 소매가 하얀 팔을 덮기 전, 옅게 손자국이 남은 것이 언뜻 보였다. 

 “하지만 저는 이 일 때문에 레이지 씨와의 관계를 끊겠다거나, 거리를 두겠다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알아두세요.”
 “이유를 물어봐도 돼?”

 생각하기보다 먼저 튀어나간 말이었다. 진작에 말로 했다면 좋았을걸, 억누르려고 했다가 괜히 겁이나 주고 말았다. 뭐, 겁주는 것도 실패해버렸지만.

 “너는 왜 그렇게까지 나를 믿어주는 거야?”
 “당신이 먼저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했잖아요.”

 치즈루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리모컨을 들어 아직까지도 흘러나오고 있던 반주를 껐다. 치즈루는 리모컨을 다시 테이블 위에 놓은 뒤 바닥에 떨어진 마이크를 줍고 머리카락을 휙휙 털었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한 것도 당신이에요. 그래놓고 도망치는 건 용납하지 않겠어요. 내가 납득할 때까지, 당신이 만족할 때까지 서로 어울려주기로 해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려는 뜨거운 것을 억지로 꾹 눌러 삼켰다. 아직 의문은 전부 해소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이상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낮과 변함없이 올곧은 그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벌써 이런 시간이네. 부모님이 걱정하시겠어. 데려다줄게.”

 겨우 끄집어낸 말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말이 없었다. 적신호에 걸렸을 때 슬쩍 조수석을 곁눈질해도 치즈루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녀의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 역에 차를 세우고 치즈루를 내려주었을 때, 나는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처음으로 입을 뗐다.

 “조심해서 들어가.”
 “바로 요 앞인데요, 뭐.”

 그녀는 몇 걸음 걸어가더니,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 즐거웠어요. 생일 축하해요, 레이지 씨.”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유유히 걸어가는 치즈루의 뒷모습이 골목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계속 그 자리에서 차를 세우고 헤드라이트를 켜서 어두운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

제가 오랫동안 공들여서 레이지 드림을 짜긴 짰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지가 치즈루를 사랑할 수 있나?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거예요.

제 캐해석 상으로 레이지는 자기혐오를 가진 사람이고, 그래서 자신과는 다르게 깨끗하고 반짝인다고 생각한 하루카를 사랑한 건데... 그런 레이지가 여러모로 자기와 닮은 치즈루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저 치즈루를 동정해서, 자기처럼 되지 않게 도운 것일뿐 그 이상은 아닌 게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래서 전체적인 관계의 해설과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주로 타로를 보기로 했습니다.

(이건 딴얘기인데 트친분께서 드림커플 테마곡을 들으면서 카드를 뽑으셨다길래 저도 따라서 네버를 들으면서 뽑았는데... 이거 정말 효과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께도 추천해드립니다)

그래서 뽑고... 결과를 받았는데... 이게... 정말... 일단 보시죠

한줄 요약: 사랑하는 거 맞대요

카드만 보았을 때, 저는 아야님이 왜 레이지의 치즈루에 대한 사랑의 순수성?을 의심하셨는지... 이해가 안 될만큼 확신과 사랑에 차 있는 것으로 읽혔어요. (중략) 아이네를 닮은 건 다만 레이지에게 가까워질 계기를 제공해주었을 뿐, 치즈루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두 사람의 관계의 기반은 사랑과 동반, 그 자체예요.

서로가 있는 이상 두 사람은 언제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건강한 관계이구요. 두 사람은 진짜 놀라울 정도로 대칭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요.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절망’을 걱정해요.

정말로... 둘다 자기가 아픈 건 상관 없지만 상대가 아픈 건 엄청 걱정하고, 그러는 상대에게 "좀 더 스스로를 생각해" 라고 꾸짖는 사람들이거든요...

관계의 주요 포인트는 ‘닮음’ 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중략) 치즈루가 레이지를 사랑한 데에 이유가 있었다면, 레이지도 치즈루를 비슷한 이유로 사랑했을 것 같아요. 치즈루가 레이지를 이유 없이 좋아했다면, 레이지도 그럴 수 있을 것 같구요. 

아니 이게... 치즈루가 레이지를 사랑한 이유는 '무대 위의 찬란함과 자신을 향한 다정함' 이었는데... 레이지도 치즈루의 무대를 보고 같은 감상을 가졌거든요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구나" 라고... 근데 이때까지는 확신이 안 서서 드린 서사에는 레이지→치즈루 방향의 감정선은 안 적었는데 이걸 맞춰버리시네...

레이지는 치즈루를 ‘동반자’로 선택했어요. (중략) 치즈루는 존재만으로도 레이지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 만큼, 레이지는 치즈루와 함께 다시 날아오르고 싶을 것이 아닐까 싶구요. (중략) 치즈루도 레이지가 날아오를 때 본인도 날아오르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레이지가 자신이 날아오를 때에는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처럼요.

여러분

들리시나요

째깍째깍째깍째깍 따라다다다 다다다단...

플라이 투더 퓨처... 사이쵸테엔노...

플라이 투더 퓨처... 소노 사키에토 플라이 하이...

미래를 향해 함께 날아오를 동반자...

'날아오른다면 함께' 라고 생각할테고, 자신의 모든 길을 같이 걷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또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확신’ 이에요. 그래서 어느 순간 레이지에게 확신이 생겼을 것 같아요. 이 사람이랑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고 싶다는 확신. 같은 길을 걷고 싶다는, 걷게 될 거라는 확신이요.

여기서 저는 결국 머리를 깼습니다... 픽션 들을 때마다 레이지가 치즈루에게 보내는 말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것 같아요... "등을 맡기고, 손을 겹치고 같은 멜로디를 연주하며"...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미치겠어요...... 치즈루가 어떤 연유에서든 "나를 사랑해요?" 라고 물어보면 부드럽게 웃으면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라고 되묻는 레이지가 떠오르고... 레이지가 품은 다정하고도 완고한 확신🤦🤦

"너무 닮아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는 카드가 나왔어요. 닮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무엇을 해주어야할지 안다는 거예요.

여기서 정말!! 제가 품고 있던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저는 레이지가 자기혐오를 품고 있는 사람이라서 자신을 닮은 치즈루를 사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반대였던 거야... 자기와 닮은 치즈루를 사랑했기에 레이지가 자기혐오를 떨쳐낼 수 있었던 거예요... 서로의 마음을 치유해주면서 자신의 마음까지 치유할 수 있는 꼭 닮은 두 사람... 두 사람을 연결하는 닮음과 확신...

그리고 여담으로 제가 연인 카드도 뽑았다고... 레이지 쪽에서 마음이 퐁퐁 솟아나는 카드들이 나왔고 되게되게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 좋아한다고 하셔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오빠 타로카드를 통해서 대체 얼마나 홍끼를 드러낸 거야ㅋㅋㅋㅋㅋㅋ "다시는 치쨩이 불안해하지 않게!! 제대로 똑똑히 전해줘 사랑한다고!!!"<<거의 이렇게 외쳤나봐요... 내가 오빠의 홍끼를 몰라봐서 미안해 치즈루랑 백년해로하자...

그래서 저도 치즈루도 레이지가 치즈루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고 아오바 치즈루는 코토부키 레이지의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모두 판다(@PANDA_TAROT)님 타로를 보러 가세요 타로는 과학이고 판다님은 신이십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레이즈루 외에도, 아이와 그의 연인이 등장합니다.

옛날 옛날에, 어느 바닷가 마을의 맨 바깥, 방파제 너머 바다와 맞닿은 자리에 커다란 등대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다가 잔잔한 날에도 파도가 치는 날에도 낮에나 밤에나 그 자리에 우뚝 선 등대에 딸린 작은 오두막집에는 한 청년이 살았습니다. 청년은 낮이면 등대의 전등을 깨끗하게 닦았고, 밤이면 등대의 불을 켜서 밤에 출항하는 배들을 배웅했습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 일을 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청년을 성실한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청년은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쨍쨍한 여름 아침이었습니다. 간밤에 등대가 고장 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청년이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을 때, 바다와 모래의 경계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손을 눈썹에 가져다 대고 눈을 찌푸린 청년은 그것이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청년은 헐레벌떡 달려가서 그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기절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리따운 소녀였습니다. 석고상처럼 새하얀 몸뚱아리가 흰 천에 둘둘 싸여 있었고, 비단실처럼 고운 하늘빛 머리칼은 목덜미에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청년은 몇번을 불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소녀를 일단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소녀가 눈을 떴을 무렵 바깥은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낯선 장소와 잠든 새에 입혀진 옷가지, 눈앞에 앉아있는 청년과 그가 바닷가에 쓰러져있던 여자아이를 데려왔으니 도와달라고 부른 재단사 아주머니까지.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소녀는 화들짝 놀라서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당겼습니다. 덩달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청년이 양손을 휘저으면서 말했습니다.

"나, 나쁜 사람 아냐! 네가 해변에 쓰러져있길래 깨웠는데, 통 일어나지를 않아서… 근처에서는 본 적 없는 얼굴인 것 같아서 우선 우리 집으로 데려왔어. 이쪽도 마찬가지로, 착한 분이셔!!"

소녀는 여전히 두려움을 거두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슬금슬금 이불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머니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서 물었습니다.

"레이지 씨 말이 맞단다. 얘야, 어디서 왔니? 이름이 뭐야?"

소녀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꼭 닫혀있던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벌린 입 사이로는 아무런 소리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소녀와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그를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소녀의 희고 가느다란 목에서는 아, 아─ 하는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습니다. 소녀도 당황한 듯 제 목을 손으로 감싸고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떨구고, 손을 들어 창문 너머 밤바다를 가리켰습니다.

그렇게, 파도에 밀려온 말 못하는 소녀는 등대지기 청년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옛날 옛날에, 어느 깊은 바다의 아래에 인어들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푸르고 풍요로운 왕국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하루의 마지막에 젊은 인어들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면 나이 든 인어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즐기고 칭찬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인어가 하나 있었는데, 물살을 따라 흔들리는 비단실 같은 머리카락은 하늘의 빛을, 긴 속눈썹이 드리운 맑은 눈은 바다의 빛을 띠고 있는 아름다운 그 인어의 이름은 치즈루였습니다. 인어의 이름은 바다의 이름을 따서 짓거나 물이나 바다를 뜻하는 글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치즈루'라는 이름은 독특하게도 '새'를 의미했습니다. 인어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이름 없이 자라다가 성인식 날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짓습니다. 따라서 또래 인어들은 그 사실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곧 그가 춤추는 모습을 떠올리고서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치즈루가 그 이름을 얻은 날은 유달리도 햇빛이 쨍쨍해서 바다 아래까지도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던 한여름이었습니다.

젊은 인어들은 모두 바다 밖 육지와 인간 세계를 동경했기 때문에, 가끔 그런 날이 있으면 들뜬 가슴을 끌어안고 인간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조심 빛이 닿는 얕은 수면까지 헤엄쳐 올라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치즈루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또한 바깥 세계를 동경했지만, 그가 사랑한 것은 날개가 달린 생물과 그들이 날고 있는 하늘이었지, 두 다리로 걷는 생물과 그들이 발을 딛는 딱딱한 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바다 위로 올라가 바위 뒤에 숨어서 부둣가를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인간을 바라보며 저들끼리 이야기할 때에, 그는 혼자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바다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푸른색이 칠해진 하늘에는 아주 밝아서 제대로 볼 수 없는 빛이 있었고, 끝없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생물도 있었습니다. 어린 인어는 그 생물의 몸짓을 관찰하는 것에 푹 빠졌습니다. 그것은 인어가 헤엄치는 모습과도, 인간이 걷는 모습과도 달랐습니다. 그러던 그의 머리 위로 무언가 하얀 것이 떨어졌습니다. 그것을 소중히 쥐고 다시 친구들을 따라 바다 아래로 돌아간 인어는, 어머니에게서 그 생물의 이름이 '새'라는 것과, 그들은 '날개'를 이용해서 날아다니고, 그가 가져온 것이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인어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춤출 때마다 눈을 감고 자신이 새라고 상상해보았습니다. 자신을 둘러 싼 바닷물의 흐름은 바람이고, 물살을 가르는 꼬리는 새의 날개라고. 인어는 바닷속에서 힘껏 날아올랐습니다. 바다 아래의 누구도 그런 춤을 추지는 않았습니다. 인어들은 언제나 인간들이 추는 춤을 흉내 냈지만, 그의 춤은 새를 흉내 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인어들은 그 춤에 매료되었고, 인어는 바다 아래에서 가장 뛰어난 무용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존재에게는 반드시 시기와 질투가 따라붙는다는 것은 지구 어디에서든, 하물며 바다 밑에서도 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인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인어는 마녀의 딸이었는데, 인간을 정말 좋아하여서 바다 아래에서는 그가 성인이 되는 날에 마녀가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 오랜 소원을 이뤄줄 거라는 소문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입으로 그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했을 때, 인어는 딱 두 마디만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바보 같아.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비늘과 꼬리가 있어서 이렇게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데, 왜 인간 같은 걸 동경하는 거야?"

마녀의 딸은 그의 말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길로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울며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녀는 하나뿐인 딸을 아주 아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듣고는 매우 화가 났습니다.

"울지 말렴, 아가. 엄마가 전부 해결해 주마…."



마녀가 직접 만든 물약을 들고 인어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인간들의 난파선에서 찾아낸 흰 천을 몸에 두르고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바닷속에 커다란 날개를 펼친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녀가 그를 불렀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아름다운 춤을 보여주는 무용수 아가씨, 이걸 마셔 봐요. 이건 몸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물약인데, 마시면 지금보다도 훨씬 가뿐하고 하늘하늘하게 움직일 수 있고, 원한다면 더더욱 가벼워져서 저 하늘을 훨훨 날 수도 있을 거예요."

마녀의 마지막 말이 인어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인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마녀에게서 동그란 유리병을 건네받아 입구를 막은 마개를 뽑았습니다. 그가 물약을 마시고 퀴퀴한 냄새와 씁쓸한 맛에 얼굴을 찌푸린 순간,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갑자기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마녀의 웃는 얼굴이 보인 것 같았습니다.

치즈루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빛이었습니다. 바다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밝고 뜨거운 빛덩어리. 치즈루는 그것이 태양 같다고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습니다. 바다 아래에 태양이 비칠 리 없지요. 그렇지만 그는 다음 순간 늘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바닷물의 감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말로 새가 되어 날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날개 대신에 희고 가느다란 팔만이 보였습니다.


치즈루는 팔로 바닥을 딛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까끌까끌한 모래의 감촉 덕분에 그는 자신이 바닷가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자연스럽게도 아가미가 아니라 코와 입으로 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그가 몸을 덮고 있던 흰 천을 홱 벗기자, 그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하반신에 모두가 부러워하던 그의 날개가 없었습니다. 시시각각 다른 색을 발하는 반짝이는 꼬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팔과 마찬가지로 하얗고 가느다란 긴 다리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치즈루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똑똑하기도 한 인어였기 때문에, 금방 마녀와 그 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자신을 책망하며 바다로 돌아가 보려 했지만, 인간의 몸으로는 그 깊은 바다 아래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흰 천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익숙한 꼬리와는 다르게, 방금 막 생긴 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부드러운 모래를 딛고 일어서는데도 발바닥에는 유리 조각을 밟는 듯한 아픔이, 종아리에는 불로 달구는 듯한 뜨거움이 전해져왔습니다. 그래도 치즈루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는 없었습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걷고, 다시 고통에 주저앉고, 벌벌 떨면서 또 일어나고, 또 쓰러지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치즈루는 무작정 해변을 따라 걸었습니다.

고통이 마침내 치즈루를 삼키고 주저앉히려 할 때,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어떤 형체를 보았습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 형체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의 몸이 무너져내렸습니다. 그가 또다시 기절하려는 순간에, 다급하게 뭐라 외치는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녀는 뭍에서의 생활에 제법 빨리 익숙해졌습니다. 말을 할 수는 없어도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었던 덕분입니다. 청년은 그런 그를 성심성의껏 돌봐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소녀는 그에게서 두 다리로 걷는 법을, 옷을 입는 법을,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법을, 침대를 정리하는 법을, 마을에 정박할 배와 지나가는 배를 구분하는 법을, 풍랑이 올 것을 대비하는 법을, 등대의 불을 켜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물 밖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초목이 붉게 물들고 바람이 거세지는 가을이 훌쩍 다가왔습니다.

마을의 부두는 크지 않았지만 배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에 있었기에 연일 활기를 띠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부두를 품은 마을 역시 사시사철 풍요로웠고,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소녀 역시 그런 마을 사람들 틈에서 가끔이지만 미소를 짓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그럴 때마다 소녀의 미소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발이 넓은 청년의 오두막에는 자주 사람들이 드나들었지만, 모두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곤 했습니다. 따라서 저녁 식사 시간에 식탁에 마주 앉는 것은 소녀와 청년, 둘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둘은 서로가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늘 놓던 의자를, 접시를, 포크와 나이프를 하나 더 놓는 것뿐인데 청년은 작은 오두막이 꽉 들이찬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소녀 역시 비슷한 기분이었을 겁니다.

그날도 그렇게 둘이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유달리도 밝은 보름달을 올려다보던 밤이었습니다. 소녀는 등대의 불을 켜고 내려오는 청년의 옷깃을 붙잡고 잠시 바깥에 있어도 되겠냐고 눈짓했습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곧 담요 두 장을 들고 소녀의 곁에 앉았습니다.


바다 위에 뜬 하얀 달이 파도에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문득, 소녀가 고개를 돌려 청년의 손을 잡았습니다. 소녀는 이제 입 모양과 손짓, 서투른 글씨로 꽤 능숙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그가 자기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이유'라고 적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당신이 등대를 켜는 데엔, 이유가 있어요?'
"배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지."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던 듯, 소녀의 눈이 가늘어졌습니다. 청년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소녀는 다시 손가락을 세웠습니다.

'기다리는 배가 있나요?'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파도가 지치지도 않고 철썩대며 대화의 공백을 메웠습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너는 정말 똑똑하구나."

청년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소녀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소녀는 이제 밤하늘에서 빛나는 수없이 많은 별 중에서 움직이지 않고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별, 북극성을 찾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이 밤에는 북극성을 보고 길을 찾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모두 청년이 가르쳐준 것입니다.

"친구가 있었어. 무척 가깝고 소중한 친구가. 이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랐는데, 자기는 좁은 마을 밖의 세상이, 바다 너머의 땅이 궁금하다고 늘 말했지."

소녀는 바다 아래에 두고 온 친구들을 떠올렸습니다. 청년이 설명하는 것만큼 가까운 친구는 없었지만, 다들 물 바깥의 세상을 궁금해하는 건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늘이 아주 맑게 갠 날에, 마을에 도착한 무역선 하나를 얻어 타고 떠났어. 나에게도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나는 거절했어. 함께 떠나기보다는… 그 애가 바깥세상을 잔뜩 여행하고 이야기와 선물과 함께 돌아오면 기쁘게 맞이해주고 싶었거든."

소녀는 아직도 꼭 붙잡고 있던 청년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날이 맑았던 게 아무래도 폭풍우의 조짐이었던 모양이야. 태풍이 오기 며칠 전에는 하늘에 구름이 한 점도 없거든…. 그래서, 그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얼마 안 되어서부터,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안심하려고 애썼어. 무척 큰 배였거든. 설마 그렇게 큰 배가 부서지기야 하겠어?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그렇게 큰 배라서, 부두로 돌아오는 것도 빨랐어. …부서진 난간과 찢어진 돛을 달고, 출발할 때보다 훨씬 적은 사람들을 태우고 말이야."
'그래서 등대를 켜고 기다리는 건가요? …그 친구가, 돌아오면 맞이해주려고?'
"그래, 맞아."

청년의 이야기가 끝나자, 바닷가는 다시 파도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마을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겨울이 시작될 무렵, 청년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얇은 옷차림으로 산책을 다녀와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고 돌아온 후로 늘 재단사 아주머니에게 받은 분홍색 목도리를 하고 다녔습니다. 날씨를 잘 타지 않는 인어의 습성이 인간이 되어서도 어느 정도 남아있었던 것인지 소녀는 추위를 잘 타지 않았지만, 목도리의 까칠까칠한 감촉이 마음에 든 소녀는 그날도 같은 목도리를 하고 청년을 따라나섰습니다. 주택가에 도착해서 청년이 거리에 쌓인 눈을 치우는 동안 소녀는 두꺼운 이불을 집마다 나누어주었습니다.

일을 마친 둘이 함께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바닷가에 처음 보는 누군가가 서 있었습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기 때문에 소녀가 먼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라며 청년의 소매를 잡아당겼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의아하게 여긴 소녀가 돌아보아도 그는 여전히 낯선 등을 뚫어지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결국 소녀가 포기하고 한 발짝을 떼려던 참에, 청년이 앞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처음 듣는, 하지만 누구의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이름을 외치면서.

낯선 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소녀는 짙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 청년의 예상이 틀렸다고 짐작했습니다. 그야, 이 사람은 기껏해야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소년처럼 보였으니까요. 몇 년 전에 바다로 나선 그의 친구가 바다 밑에서 불로초라도 찾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 이런 모습으로 돌아올 수는 없을 터입니다. 과연, 청년이 곧 뜀박질을 멈추었습니다. 세 사람의 사이로 눈보라가 휘몰아쳤습니다.

눈과 함께 찾아온, 추위를 타지 않는 새하얀 소년은 자기 이름을 '아이'라고 밝혔습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성악가, 음유시인, 유랑배우… 노래할 수 있다면 뭐든 좋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맑고 아름답다고 소녀는 생각했습니다. 청년은 더 캐묻지 않고 소년에게 지낼 곳을 알아봐 주겠다고 한 뒤 마을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오두막에 둘만 남게 되자, 소녀는 바로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겨울 바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입을 뻐끔거리면서,

'너도 인어가 맞지?'

라는 질문에 소년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응."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째서 인간이 되었어?'
"…너는?"
'마녀에게 미움을 샀어.'

이제 네 차례라며 빤히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느끼고, 소년은 입을 뗐습니다.

"나는… 잊어버렸어."
'하?'

소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자 소년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습니다.

"만나고 싶은 인간이 있어서 뭍으로 올라왔어. 그런데, 올라오면서 그게 누구였는지, 왜 만나고 싶어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어. 다리를 주는 대가로 기억을 빼앗아간 거겠지. …정말이지, 성격 나쁜 마녀야."
'대가?'
"네가 다리를 얻고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말야. 뭐, 네 경우엔 원해서가 아니었지만."
'만약 그대로 쭉 그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물거품이 되어버리겠지."

소녀는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소년이 이야기를 마치고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물자 때마침 청년이 돌아왔기 때문에 소녀는 더이상 마녀의 마법에 관해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청년이 마을로 나설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재단사 아주머니께서 받아주실 수 있다고 하는데, 공짜는 아냐. 아주머니를 도와서 일을 해야 할 거야. 괜찮겠어?"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괜찮으니까 재봉소로 데려다줘."
"음, 씩씩해서 좋네! 치즈루,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이 애를 데려다주고 와서 같이 저녁을 먹자."
'다녀오세요.'

청년이 빙긋 웃고서는 소년을 데리고 오두막을 나섰습니다. 소녀는 혼자 남아 조용해진 거실에서 소년의 말을 곱씹어보았습니다. 언젠가 청년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똑똑한 이였으니까요.

지금까지 소녀는 자신이 목소리와 꼬리를 함께 빼앗는 저주에 걸렸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리는 원치 않는 결과일 뿐이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꼬리를 빼앗겼다'는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소년은 다리를 얻고 기억을 빼앗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목소리를 내주고 다리를 얻은 것이라면, 반대로 다시 다리를 잃고 목소리를 얻을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바다 아래 그가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내가 마녀에게 미움을 산 이유는, 인간을 동경하는 마녀의 딸을 무시했기 때문에. 아이가 인간이 된 이유는, 만나고 싶은 인간이 있었기 때문에. 기억을 잃은 채로 그 사람을 찾아내면 아이는 완전한 인간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녀가 제시한 조건을 달성하면 마법은 완성되거나 풀린다. 나는 어느 쪽일까? 내가 인간이 되어 뭍에 남는 것이 마녀가 원하는 결말일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고 있어?"

어느새 돌아온 청년이 심각한 표정의 소녀 앞에 쭈그려 앉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소녀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자, 청년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배 안 고파?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이한테 이것저것 알려주느라…"

찬바람을 맞으며 돌아왔는데도 청년의 손은 미미한 온기를 품고 있었고, 손바닥보다 조금 아래, 손목을 잡으면 두근, 두근,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뛰는 맥박이 느껴졌습니다. 인간이란 이리도 따뜻하고 다정하고 외로운 존재였구나.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소녀는 자신에게 걸린 마법이 무엇인지 전부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녀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 청년은 뭐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조용히 따라 일어섰습니다. 냄비에서는 나가기 전에 얹어둔 스튜가 먹음직스럽게 끓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오면 시간은 물과 함께 얼어붙습니다. 그래도 시곗바늘은 천천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창틀에 쌓인 눈은 좀처럼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아도 새순은 이미 차가운 땅 아래에서 참을성 있게 싹틔울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겨울에도 부두에는 배가 드나들고, 등대지기 청년은 묵묵히 제 일을 했습니다. 소녀 역시 변함없이 그를 도왔습니다. 재봉소에 얹혀사는 소년은 손재주가 제법 좋아서 허드렛일을 넘어 아주머니의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 말도 들려왔습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겨울을 나고 있었습니다.


겨울의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밤이었습니다. 소녀는 창틀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습니다. 청년은 이미 일어나 앉아있었습니다. 그를 따라 창밖을 내다보면 바다가 울부짖는 꼴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때아닌 늦겨울의 폭풍우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이내 청년이 외투를 챙기는 것을 보고 소녀는 그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밤새 비바람을 맞은 등대의 불이 어느샌가 꺼져있었기에 그가 다시 켜야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소녀는 이토록 거친 날씨에 그를 내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위험할지도 몰라요.'
"알고 있어. 그래도 내 일이잖아."

청년이 부드럽게 웃었습니다. 언제나 상냥한 그이지만, 이런 미소를 지을 때 그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걸 소녀는 잘 알았습니다. 소녀는 천천히 팔을 쥔 손의 힘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의자에 걸린 자신의 외투와 목도리를 꺼내 들었습니다.

"같이 가줄 거야?"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청년이 계단을 올라 난간에 서는 것을 소녀가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조금은 기세를 꺾을 무렵, 바닷가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의 목소리, 아니, 노랫소리였습니다. 둘은 무심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오늘 밤 조업을 나간 어부의 딸이 해변에 서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할머니가 또 그의 할머니에게 배워서 이제는 다시 손녀에게 가르쳐주었을, 바닷사람이 무사히 집에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오래된 노래였습니다. 소녀는 옷과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도, 살을 에는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힘차게 노래했습니다. 바로 그때, 마을 쪽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물빛 머리칼의 소년이었습니다.

찾았구나, 아이. 두꺼운 외투로 작은 어깨를 감싸주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소녀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습니다. 폭풍이 점점 멎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사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난 뒤, 겨울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네 사람은 각자의 잠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아침이 밝자, 조업을 나간 어부들은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나긴 겨울을 지나, 바닷가 마을에도 드디어 새싹이 움트는 봄이 찾아왔습니다. 소년은 마침내 마을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여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었고, 오두막에 사는 두 사람은 여전히 등대를 켜고 끄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가로수에 성급한 꽃봉오리 몇 개가 꽃을 피운 날이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소녀는 청년에게 전했습니다.

'돌아갈 때가 가까워진 것 같아요.'

그가 이 한 마디를 전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는 것을 청년은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두 사람분의 식기를 집어넣고 찬장 문을 닫으며 청년이 말했습니다.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어."
'왠지?'
"응. 그냥 느낌으로."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청년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날과 같은 평범한 하루가 흘렀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밤에 소녀는 홀로 등대에 올랐습니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는 깊고 푸른 바다는 언제나 그리운 고향의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오두막에서 지내는 내내 바로 곁에 두고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가자니 혼자 남을 청년이 눈에 밟히는 것 역시 사실이었습니다. 소녀가 눈을 감았습니다. 잔잔한 파도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물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 그 노랫소리는 오로지 땅 위에서 사는 존재만이 들을 수 있는 노래이겠지요.

인간을 동경하는 마음을 무시한 그에게 내려진 벌은 바로 인간의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일. 두 다리로 땅에 서서 인간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그들이 정말로 동경할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스스로 느껴보는 일. 그리하여 가장 따뜻하고 다정하고 외로운 이에게 마음을 빼앗겼을 무렵, 영영 그의 곁에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다시 꼬리를 달고 바다로 돌아오는 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알게 된 것은 며칠 전이었습니다. 혼자 해변을 산책하던 소녀의 발치에 파도가 밀려왔을 때 무심코 한 발을 물 속으로 내디뎠더니, 인간의 피부 위로 살그머니 은빛 비늘이 돋치는 것이 아닌가요.

소녀는 다시 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마치 마법처럼, 기척도 없이 올라온 청년이 그의 곁에 서 있었습니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갈색 머리칼이 나부꼈고, 그럴 때면 청년은 조금 서글픈 미소를 지었고, 그럴 때면 소녀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싶어졌습니다. 소녀는 새삼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다는 걸 기억해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아무리 인간과 닮게 되었어도 혹시나 자신의 심장이 그의 심장과 다른 박동으로 뛰는 것을 들킬까 봐? 미처 변하지 않은 비늘 한 조각을 들킬까 봐? 하지만 이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요.

소녀는 마침내 바라던 대로 팔을 뻗었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약간 큰 키의 청년을 품에 꼭 껴안았습니다. 청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습니다. 소녀는 보기보다 단단한 팔이 제 몸을 꽉 끌어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레이지 씨."

일 년 동안 울리지 않던 성대가 옅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청년이 팔을 풀고 소녀를 보았을 때, 그의 눈가에서 떨어져 내린 것은 투명한 눈물이 아니라 새하얀 진주였습니다.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함께 지내는 동안, 정말 즐거웠어요. 진심이에요."
"치즈루,"
"안녕, 잘 있어요. 고마웠어요, 레이지 씨."
"…조심해서 돌아가. 등대는 항상 켜둘 테니까, 내가 보고 싶어졌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괜찮아."
"꼭 한번은 찾아올게요. 당신의 빛은 분명 바다 아래에서도 잘 보일 테니까."

등대의 불을 받아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검은 바다 위로 길게 드리워졌습니다. 아침이 밝으면 사라질 그림자 하나가 파도 위로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다시 여름이 돌아왔습니다. 등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고, 오두막에는 등대지기 청년이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홀연히 사라진 파도 거품을 닮은 소녀의 행방을 궁금해했지만, 그럴 때마다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만 대답했습니다. 견습 재단사가 된 소년과 그의 연인만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끔 들러 청년의 말동무가 되어주었습니다. 


청년은 그날도 등대에 올랐습니다.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다른 무언가도 함께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그마한 배 한 척이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청년이 전등 수리를 마치고 등대에서 내려올 무렵, 그 배는 부두에 닿아 닻을 내리는 참이었습니다. 배에서 내린 이는 해변을 가로질러 등대로 향했습니다. 청년은 오두막으로 돌아가려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레이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갔고, 등대지기와 인어와 소년과 소녀와 모험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건 레이지 너한테만 말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알았지? …듣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비웃으면 안돼?
알았으니까 말해봐. 뭔데 그래?
지난번에 말했지? 목숨은 부지했어도 너무 먼 나라에 도착해버려서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래. 그런데도 너는 결국 돌아왔고.
맞아,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지. 나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여러 배를 얻어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돌아다녔어. 그러다가 돌아갈 수 있으면 행운이고, 그렇지 못한다 해도 죽는 날까지 세계를 여행해 보려고 했어. 그러던 어느 날…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인어를 만났어.
……인어?
응. …진짜야! 믿어줘.
믿어. 정말로.
바다 위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푸른 비늘을 가진 아름다운 인어가 갑판 위에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어. 그가 내게 마을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었고, 바람이 부는 방향과 곧 닥칠 풍랑을 대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어. 그 덕분에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고.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전부 잊지 않고 기억해주었네, 치즈루.


바라던 배가 돌아온 후에도 등대지기는 날마다 등대의 불을 밝혔습니다. 폭풍우에 헤매는 배를 위해. 어둠에 길을 잃은 나그네를 위해.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인어를 위해. 그는 북극성처럼,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