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를 위한 윤무곡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유독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내가 두 명의 남자애를 처음 만났을 무렵의 기억. 첫 번째는 진구지 렌. 그는… 딱히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이다.

"나는 코토부키 레이지, 레이쨩이라고 불러줘! 레이지 오빠도 괜찮아!"

다른 건 전부 흐릿한데, 그렇게 자기를 소개하는 명랑한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레이쨩, 코토부키 레이지. 동글동글하고 귀엽게 생긴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스튜디오 한 구석에 앉아있는 나에게 말을 붙이던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남자애. 자칭 '레이지 오빠'.


그의 이름을 다시 들은 건 내가 중학생이던 무렵, 집에 오는 차 안에서 기사님이 틀었던 라디오에서였다. '아이돌이 되었구나, 명랑하고 잘 웃는 사람이었으니까 잘 어울리겠다' 정도의 감상을 떠올린 뒤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에 맞춰 머리를 까닥거리며 조수석 시트에 머리를 대고 잠을 청했다. 어딘가 몽환적이고 꿈결 같은 구석이 있는 그의 목소리 덕분에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단잠을 취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봄,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단독 공연이 열렸다. 나에게 주어진 초대권을 누구에게 보낼까 고민한 끝에 문득 떠오른 그의 이름을 말했더니, 친구들이 양옆에서 좋다고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결국 나는 '샤이닝 사무소의 코토부키 레이지 님'에게 초대권이 동봉된 편지를 보냈다. 당일엔 정신이 없어서 내가 그를 초대했다는 사실조차 까먹어 버렸지만, 그는 친절하게도 "급하게 오는 바람에 꽃다발을 준비하지 못해서 미안해. 멋진 공연 정말 잘 봤어요."라고 쓴 쪽지와 함께 그의 사인이 적힌 CD를 대기실 탁자에 한가득 놓인 꽃다발 아래에 끼워 넣고 갔다. 꽃가루로 간질간질한 코를 훌쩍이며 산처럼 쌓인 장미를 들추다가 -이건 전적으로 진구지 렌이 나를 약 올리기 위해 내게 어울리지도 않는 빨갛고 무거운 장미를 잔뜩 보낸 탓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윙크하는 남자의 사진과 눈이 마주친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백 송이 장미보다도 값진 감상평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코토부키 레이지라는 아이돌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니 약하고 못난 내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시기에,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갑자기 내 병실 문을 열어젖혔던 그날, 내가 얼마나 놀랐을 지가 짐작이 가는가?

"나는 코토부키 레이지, 레이쨩이라고 불러줘. …뭐, 소개는 따로 필요 없었으려나?"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방금 전까지 내가 보고 있었던 티비를 흘끗 쳐다보았다. 티비에서는 유쾌하게 토크쇼를 진행하는 그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화면 너머에서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보고 얼어붙어 버렸다. 그가 그런 나를 보면서 병실 안쪽으로 한 발짝을 내디뎠다.

"갑작스레 미안해. …나라면 너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며 할 말을 쥐어짜내고 있는 동안, 그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언제나 투명한 유리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던 그는 이제 내 앞에 아무런 가림막 없이 서 있었고, 오히려 내가 쳐둔 경계선을 헤집고 넘어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보던 것보다 수수한 차림새를 한 그의 미소는 전매특허인 아이돌 스마일보다는 조금 옅었고, 그래서 더 인간적이었다.

"오지 말아요!"

내가 돌려줄 수 있는 말은 그 한 마디였다. 날카롭게 소리치는 내 목소리를 듣고 그는 제자리에 멈춰 섰지만, 이미 한껏 가까이 다가온 후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둥그렇고 단단한 회색 눈이 다음에 할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나를 난도질하고 발가벗겨서 보이고 싶지 않은 곳까지 모조리 드러내려는 것만 같이 느껴져서, 주먹을 꽉 쥐었다. 꽤 길게 자란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아팠다. 한껏 가시 돋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억지로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착각이에요. 한물간 광대 주제에."

돌아가요. 당신을 좋아하는 만큼, 못난 나를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는 당신의 기억 속에 무대 위의 아름다운 내 모습만을 남기고 싶어.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담요 아래로 숨기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렇게 온 비극을 혼자 짊어진 양 하고 있으면 재밌어, 날개 꺾인 천사 양?"

다음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날 선 대답이 날아들어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익살맞고 상냥한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에는 방금 내가 지은 것과 비슷한 비웃음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뒤에 켜진 티비에서는 여전히 활짝 웃는 그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어서, 어느 걸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그가 다시 입을 뗐다. 미소는 차갑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운 부조화마저도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그는 틀림없이 내가 본 적 있는 '코토부키 레이지'였고, 동시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었다.

"쌀쌀맞네~ 같은 처지끼리 그러지 말자."
"…당신이랑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요. 기분 나빠."
"글쎄, 별로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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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질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평소의 모습에서는 떠올릴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을 지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바쁜 그가 버릇없는 여자애 하나를 만나러 보는 눈도 많은 병원을 들락날락할 리가 없다고, 그게 정말 마지막 만남이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내 예상을 보기 좋게 깨부수고 그는 시간이 빌 때마다 내 병실에 왔다. 그는 처음에는 다친 곳이 아직 다 낫지 않아서, 그다음에는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 여름 감기에 걸려버려서 병원에 온 김에 내게 들렀다고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가 문을 여는 소리에 놀라지 않게 되었고, 그도 더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 그렇게 내 외롭고 조그만 하얀 방의 의자 하나는 그의 것이 되었다.

그는 거기에 앉아서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돌려주지 않아도 그는 재주껏 혼잣말을 이어나갔고, 듣다 못한 내가 결국 한번 입을 열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대화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내가 피곤한 날이나 도저히 받아줄 기분이 아닌 날에는 내 기분을 읽은 것처럼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들고 온 대본을 읽거나 태블릿으로 무대나 방송의 모니터링을 했다. 닫힐 새가 없던 입술을 꾹 다문 채 일에 집중하는 그의 옆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있으면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빛이, 가끔 대사를 중얼거리며 열리는 입이,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 손끝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더운 초여름 어느 날, 나는 커튼을 치고 영화를 보다가 영화가 너무 지루했던 나머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언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깬 내가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접혀있던 휠체어를 펴기 위해 낑낑대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뭐해요?"
"아, 깼어? 이것 좀 알려주지 않을래?"
"반대쪽을 잡아당기세요."
"아하, 이렇게?"
"네, 그렇게. …뭐 하는 건데요?"
"나 오늘 오프야. 치쨩이랑 드라이브 가려고."
"당사자의 의견은?"
"응? 싫어?"

그가 휠체어를 밀어서 침대 옆으로 가져온 뒤에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목줄을 쥔 건 자기인 주제에, 뻔뻔하게도. 나는 그를 쏘아보면서 침대에서 내려갔다. 비틀거리는 나를 붙잡아 휠체어에 앉힌 그가 내게 침대 옆에 놓인 신발을 신겨주었다. 나는 화풀이로 발을 괜히 휘젓고는 휠체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머님한테는 허락 받았어."
"네? 우리 엄마랑 알아요?
"말 안 했나? 위험한 세상인데, 여자애 병실에 다 큰 남자가 드나드는 건 아무래도 보기 좀 그러니까 싫으시다면 오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미 다 알고 계셨다고, 네가 싫어하는 것 같았으면 당장에 오지 말라고 하셨을 거래. 근처 병실도 비워놓았고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길도 알려주시면서 사람들 눈 신경 쓰지 말고 말동무를 해주라고 하셨어."
"…권력남용이네요."
"딸을 아주 아끼는 멋진 어머니시지."

최근엔 간호사 선생님 말고는 복도에 다니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그런 이유였을 줄은 몰랐다. 그 바쁜 사람을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봤더니 "혹시나 했는데 렌렌이 연락처를 알고 있더라고. 따님 얘기라고 하니까 바로 만나주셨어."라는 대답을 돌려받아서, 어금니를 으득 깨물면서 역시 진구지 렌을 내 인생에서 치워버려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그의 애마는 옛날 영화에서나 종종 본 적 있는, 딱정벌레를 닮은 자그마한 초록색 자동차였다. 나는 그게 가다가 멈춰 서지나 않을까 의심하며 조수석에 탔지만, 제 주인을 닮은 비틀은 용케도 목적지까지 멀쩡히 굴러갔다. 내가 내리면서 신기하다는 눈으로 차를 훑어보자 "괜찮다고 했지!"라고 외치는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단: 공식 일러스트 / 하단: 오브 님 커미션

 

그가 나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도쿄 근교의 어느 한적한 바닷가였다. 평일 한낮이라 차가 별로 없는 도로를 달리는 내내 더운 날씨에 대해, 방송국 사람들의 사정에 대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대해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도착할 즈음엔 이야깃거리가 없어진 우리는 조용히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가 내가 탄 휠체어를 밀면서 걸었다. 나무 데크를 지나 모래사장에 도착해서 내가 신발을 벗고 일어서려 하자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내 팔을 잡아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모래는 부드러워서 별로 무리가 안 가요. 아예 못 걷는 몸이 된 것도 아니고."
"알고 있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 손 잡아."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이미지와 다르게 단단한 손이 신기해서 한번 꽉 잡았다 놓았더니 그가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왠지 부끄러워진 나는 고개를 홱 돌리고 모래사장을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고운 모래의 감촉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여름의 태양이 뜨겁게 달궈놓은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걸었다. 그가 차 뒷자리에서 꺼낸 밀짚모자를 씌워주는 것을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머리카락과 밀짚모자에 묶인 두 개의 하얀 리본이 바닷바람에 날려 흔들렸다. 햇빛은 쨍쨍했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인어공주 같네."
"네?"
"치쨩 말이야. 처음 다리가 생겨서 비틀거리는 인어공주님 같아."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말하는 그의 앞에서, 나는 당황하여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고 바보같이 얼굴을 움찔거리다가 결국 못 들은 척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그러자 키득거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 멋대로 데려와 놓고 이제야 묻는 것도 좀 웃기지만, 바다는 좋아해?"
"좋아해요. 해변을 맨발로 걷는 것도, 파도를 구경하는 것도, 물장난을 치는 것도."
"다행이다… 여기는 있지, 내가 널 처음 본 곳이야."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보았다. 그의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한들한들 나부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 병원에서 처음 만났잖아요?"
"응, 그건 그런데. 그 전에, 나는 네가 나오는 꿈을 꾼 적이 있거든."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안 믿어도 좋아, 이상하게 생각해도 괜찮아. 하지만 분명 내 꿈속에서 너는 이 해변에 서 있었어. 그래서, 꼭 같이 와보고 싶었어. 어울려줘서 고마워."

이 남자는 종종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영문을 모르는 말을 했다. 처음 만났던 날부터 쭉. 그래서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열심히 생각해봤자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믿어줄게요."
"푸핫, 그 말투는 뭐야! 전혀 못 믿겠다는 목소리인데!"

웃음을 터뜨린 그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무언가 말해보려고 입을 빠끔거리다가, 곧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말을 유창하게 하는 재주는 내게 없었다. 


이글거리는 태양도 한풀 기세가 꺾였을 즈음, 우리는 해변에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가 들고 있던 짐 속에 바닥에 주저앉기 힘든 나를 위한 작은 피크닉 의자도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이 남자의 준비성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늘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시끄럽고 덤벙대는 척하지만, 실은 그렇게 하면서 누구보다도 섬세히 주변을 둘러보고 자기가 할 일을 빠짐없이 완수하는 사람. 내가 보고 들은 바로 느낀 코토부키 레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섬세함이 그 자신에게 향하는 일은 적고, 필사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주변에 다정해지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였다. 상냥함의 이유를 알려 드는 건 주제넘은 짓일까?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그의 호의를 얌전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걸까? 그가 싸 온 도시락을 열어 내놓는 동안 나는 스스로 그렇게 질문했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에게서 건네받은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도시락 속 가라아게를 집어 올릴 뿐이었다.

가끔 그가 병실로 들고 오는 도시락의 기함할 만한 칼로리와 진한 양념 맛에도 슬슬 익숙해져서, 때로는 심심한 병원 밥을 먹다가 그 양념이 그리워져 입맛을 다시는 일도 있었다. 처음에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조미료 맛에 놀라서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는데, 인간의 적응력이란 무섭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라아게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짭조름한 맛이 혀끝에서부터 찌르르 퍼져나갔다.

"그러고 보니,"

나를 뿌듯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그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무릎에 올려둔 도시락을 묵묵히 다 비워갈 무렵, 식사 내내 파도 소리만 들리는 게 답답했던 내가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뗐다.

"응?"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요. 세상에는 단 한 번의 실수가 인생을 바꿔놓는 일도 있는 법이라고."
"…아아, 그랬지. 근데 그게 왜?"
"당신의 실수는 뭐였어요?"

그 말을 하던 그의 시선이 티비 속 물결치는 푸른 바다에 붙박여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차가운 눈도 대본을 읽을 때의 진지한 눈도 아닌, 아직도 그를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눈빛을 하고 있던 것도 기억했다. 웃고 있는 듯한, 울고 있는 듯한.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악몽을 꾸는 듯한.
지금도 그랬다. 미간을 아주 약간 찌푸린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가 이내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되물었다.

"갑자기 왜 그걸 묻는지 물어봐도 돼?"
"글쎄요, 왠지 모르게… 당신이 나를 바다로 데려온 이유랑 관련이 있을 것 같거든요."
"아하핫, 역시 치쨩은 똑똑하네. 눈치 빠른 아이는 싫지 않아."
"거짓말."

그건 들키고 싶지 않다는 표정임에 분명했다. 나도 속내를 질리도록 숨기고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쉽지만 그건 아직 비밀이야. 비밀은 남자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주거든~"
"아직?"
"그래, 언젠가는 꼭 알려줄게. …응, 알려줄 날이 오면 좋겠네."

덧붙인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 같았다. 눈부신 여름 햇살을 등진 그의 얼굴이 순간 잘 보이지 않았다. 언뜻 스쳐 지나간 것은 그림자였을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을까. 바람이 우리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모습이 여름날 아지랑이처럼 흐려졌다가, 바람이 잠잠해지고 눈을 똑바로 뜨자 다시 또렷해졌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하며 물기와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은 피부에 안 좋을 거라며 툴툴대는 그는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앉아있던 의자를 원래대로 접어서 옆구리에 끼고 반대쪽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돗자리를 접기 위해 일어서려던 그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갈까요, 레이지 씨."

딱히 이상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를 마주보기가 어색해서 괜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행히도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잠깐이지만 꽉 붙잡힌 손이 따뜻했다.

레이쨩도 레이지 오빠도 코토부키 레이지도 아닌 그 사람을 내가 '레이지 씨'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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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지 않아? 잠깐 자도 괜찮… 다고 하기도 전에 이미 눈 감았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우리를 태운 차가 해안도로를 따라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가 끊기고 내가 앉아있는 시트가 살짝 뒤로 눕혀지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만약 인어공주에게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슬픈 결말은 나지 않았을 텐데. 만약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왕자를 만나러 가기 전에 상냥한 인간 청년이 그 손을 잡아주었더라면 그녀는 분명 그를 사랑했을 텐데.

잠들기 직전, 몽롱한 정신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 자,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파도 소리와 섞여 귓전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