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루스를 위한 헌시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 속에서 힘겹게 눈을 뜨자,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맑은 푸른색을 띤 바다는 눈이 멀 만큼 세찬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얼룩 한 점 없는 선명한 푸른색의 바다와 그 위로 넘실대는 하얀 파도 거품. 그리고 그 앞에 선 사람 한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그를 향해 걸었다. 내 발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어서,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고운 모래의 감촉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졌고, 나는 그가 새하얗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가냘픈 소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다가가자, 나는 왜인지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대신에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소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빛을 담은 기다란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커튼처럼 흩날렸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에는 군청색 파도가 넘실거렸다. 여름 바다를 닮은, 햇빛 속에 부서질 것만 같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만 같은 덧없는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였다. 소녀는 머리카락에 하얀 리본을 묶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를 이 세상에 묶어두고 있는 것이고, 그게 풀리면 그대로 저 하늘 멀리 날아갈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눈을 찌르는 여름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그러자 소녀의 윤곽이 흐릿해져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나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우리의 거리는 너무 멀었고, 내 손은 소녀에게 닿지 않았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대로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것만 같은 덧없는 푸른 빛. 내가 잃어버린 존재. 내가 구하지 못한 존재. 바닷가…

방파제를 무너뜨린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기억 때문에 깨질 듯 아파지는 머리를 움켜쥐는 나를 소녀가 지켜보고 있었다. 소녀는 입을 꾹 닫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를 도와줘. 나를 구해줘─

소녀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기다려, 널 도울게. 구해줄게. 붙잡을게.

그러나 뻗은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소녀의 모습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사라지고. 나는 그렇게 또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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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발목에 찌르르 퍼지는 통증을 끌어안고 꿈에서 깼다.

관자놀이를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어제 안무 연습 중에 삔 발목의 통증 때문에 잠을 설친 것 같았다. 평소 잘 꾸지 않는 꿈을 꾼 이유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전날 밤에 적당히 파스를 붙이고 잤는데, 딱히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이상 두었다가는 스케줄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 최대한 신속하게 병원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침대 밖으로 나왔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켜자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거실로 나와 불을 켜고, 밝아진 주변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박이던 내 눈꺼풀 너머로 어느 형상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보았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 누구였을까…"

꿈의 내용은 꿈에서 깬 순간부터 빠르게 흐릿해졌기 때문에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진짜 같이 생생했던 발을 간질이는 모래와 뺨을 스치는 바닷바람의 감촉,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 그 모습이 사무치게 서글펐다는 사실.


"내일까지 푹 쉬어야 해, 푹! 알았어?"
"아하하, 그렇게 말해도… 나, 당장 오늘 저녁에도 방송 촬영 있는데."
"토크쇼라면 몰라도 버라이어티는 안돼! 발목에 무리가 갈 수 있는 건 하지 말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아, 그건 다행이다. 오늘은 마이라스 촬영날이니까~"
"하여튼, 또 그렇게 헤실헤실 웃으면서 빠져나가려고 하지… 진짜 제대로 쉬어야 돼? 이 상태로 무리했다간 더 나쁜 결과만 나온다?"
"네에네에, 명심할게요…"

어린아이를 혼내는 듯한 간호사의 태도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심한 부상은 아니고 며칠 쉬면 금방 나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무리한 이야기였다. 나한테 쉴 틈이 어디 있어, 맘속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형외과를 나서려는 바로 그때, 내 옆으로 휠체어 한 대가 휙 지나갔다.

다리 다친 환자가 팔힘은 좋네… 그런 실없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고, 그다음에는 차르륵 내려앉는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여름 바다의 푸른빛이 눈앞에서 일렁였다.

틀림없이 꿈에서 본 그 소녀였다.

"레이쨩? 왜 그래?"

내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저 애는…"
"아아, 저 애… 불쌍하게 됐지."

다시는 무용을 못할 거래, 그렇게 덧붙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 소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오바 치즈루…"

오직 그녀만을 위해 지어진 이름이라는 생각마저 들었기에 한자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푸른 날개'라는 뜻의 아오바(青羽)에 '천 마리 학'이라는 뜻의 치즈루(千鶴).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날아오르는 천사를 닮은 그 모습에 꼭 어울리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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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그 이름이 쓰인 봉투 하나를 사무소에서 받아 온 적이 있었다. 직원은 사무소로 보내긴 했지만 팬레터는 아닌 것 같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뉴스나 신문에서 '일본 현대무용의 유망주' '지상으로 떨어진 천사' 등의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몇 번인가 본 적 있는 이름이었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 사이였기에 잔뜩 의문을 품은 채 초록색 편지 봉투를 뜯자 종이 두 장이 툭 떨어졌다. 하나는 "아오바 치즈루 첫 단독 공연 '날아오르다(羽ばたく)' " 의 티켓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갈한 글씨로 쓰인 편지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은 아마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키즈모델 시절에 당신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당신이 다정하게 대해준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당신이 아이돌 활동을 시작한 뒤로는 나 또한 본격적으로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챙겨볼 시간은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소식이 들리다 보니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시간이 된다면 보러 와주었으면 한다.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달력을 확인하자, 공교롭게도 일주일 내내 꽉 찬 스케줄 사이에서 딱 그날 저녁만이 비어있었다. 잠깐은 그 시간에 집에 와서 쉬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서라도 가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달력의 빈 자리에 '아오바 치즈루'라는 이름과 공연장, 시각을 적어넣고는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 안에 넣어두었다.


며칠 후, 촬영이 예상보다 늦게 끝난 탓에 최대한 빠르게 차를 몰고 온 내가 간신히 지연입장을 면하고 객석으로 들어가 앉을 무렵, 한 소녀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중력의 간섭을 받지 않는 존재라도 되는 듯한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등장한 그녀가 가볍게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새하얀 치맛자락이 흔들렸다. 그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를 따라 발끝에 도달한 시선은 다시 손끝으로 옮겨가고, 공기의 결을 읽고 헤집는 듯한 우아한 손짓을 따라 허공을 맴돌았다. 경쾌한 리듬에 맞춰 통통 튀던 몸짓이 점차 잦아들고, 느려지는 선율을 따라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녀가 본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앉아있는 관객석도, 극장의 천장도 아니었다. 저 멀리 높은 곳, 하늘 꼭대기에서 빛나는 별을 보았다. 그곳이 그녀의 고향이었고, 돌아가고자 하는 곳이었다. 밤하늘이 비치는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를 홀린 듯이 보고 있었는데, 그사이 음악은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천천히 일어선 그녀가 흰 팔을 높게 뻗었다. 닿지 않을 별을 움켜쥐기 위해 다시 몸을 일으키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름 말재주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 평생을 가볍게 부정하면서 그 어떤 단어로 표현해도 모자랄 아름다운 날개를 펼쳤다.

나도 분명,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을 터였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줄줄이 밀려 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꽃다발을 든 관객들을 찾아 뒤를 쫓았다. 급하게 오는 바람에 가방에 든 것은 프로모션을 위한 신곡 앨범과 네임펜뿐이었지만, 아쉬운 대로 안내 데스크에서 포스트잇을 빌려 짧은 쪽지를 남겨서 대기실 앞 테이블에 산더미처럼 쌓인 장미꽃 아래에 CD를 밀어 넣었다. 그녀가 보여준 무대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찬사라고 느껴져서 조금 부끄러워진 나는 다음엔 꼭 제대로 된 선물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극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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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병문안을 가고 싶은데. 혹시 병실이 어딘지 알아?"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는 사이였어?"
"뭐, 어쩌다가."
"정말로?"
"정말로. 거짓말을 해서 뭘 어쩌겠어?"
"그건 그렇지만…"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연 간호사에게서 병실 호수를 듣고, "애가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조심해라"라는 알쏭달쏭한 충고까지 듣고 나서 병동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병실 문 앞에 다다라 차가운 은색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곧바로 그것을 당기지 못했다. "위선자." 나를 그렇게 부르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퍼뜩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어쩌면 그의 말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 문을 열고 나서, 상처 입은 소녀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위로는 지긋지긋할 것이다. 네 탓이 아니라는 말은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처음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는 남자 앞에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눈물을 흘릴 리도 없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 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위안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꿈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소녀의 모습 또한 떠올랐다. 푸른 바닷빛의 눈동자 속에 떠 있던 별들을 쓸고 지나간 해일을 떠올려 보았다. 한낱 우연이고 꿈에 불과해도, 소녀는 내게 구해달라고 말했다. 위선이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좋으니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어야만 했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열렸다. 이윽고 마주친 것은 적잖이 놀란 표정의 소녀. 공교롭게도 그녀는 방금까지 내가 나오는 방송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티비 속의 나와 비슷한 웃는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안녕, 나는 코토부키 레이지. 레이쨩이라고 불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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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다. 다시 만난 치즈루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내가 그때 본 꿈꾸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그게 그녀의 본모습이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내가 보았던 아오바 치즈루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지만, 날개가 부러진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스스로 가시덤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내가 정말로 그녀를 위했다면 가시덤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그녀를 데리고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어찌할 수 없는 위선자인 나는 그 앞에 주저앉기를 택했다. 

네가 못된 척을 하고 싶다면 어울려줄게. 연기는 자신 있거든.

그렇게 속삭이면서 여린 마음에 파고들어 내 자리를 만들었다. 솔직히 날 쫓아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내가 병원 침대 곁에 앉아 실없는 잡담을 늘어놓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대화에 어울려주는 횟수가 점점 늘어날 때마다 내심 기뻤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벚나무의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늦봄의 나른한 오후, 나는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수석에 가지런히 놓인 도시락도 함께. 신호에 걸려 잠깐 차를 멈춘 동안 도시락을 내려다보면서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좋아해 주려나…"

지난번에 병실에 들렀을 때 간호사에게 받은 부탁이 있었다. 안그래도 마른 애가 입원하고서 더 말라서 걱정이라고, 몸이 튼튼해야 다리도 빨리 나을 텐데 뭐라도 좀 먹게 해볼 수 없겠냐고. 병원밥보다 훨씬 열량이 높은 것도 괜찮겠냐고 되물었더니 오히려 환영이라고, 고기를 먹어야 뼈가 빨리 붙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전문가가 그런 말을 해도 되냐고 꼬투리를 잡고 싶은 것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준비한 것은 당연히 코토부키 특제 가라아게 도시락. 이제껏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선택이었다. 고슬고슬한 밥, 식어도 맛있는 가라아게에 타르타르소스까지 곁들이면 그 까칠하던 입사 초의 란란에게서도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으니. 따라서 이번에도 어머니의 솜씨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지만, 맛과는 별개로 치즈루가 도시락을 선뜻 먹으려 할지가 문제였다. 그러는 사이 신호가 다시 바뀌었고 나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치며 액셀을 밟았다.


스트레스나 히스테리 때문에 안 먹는 것도 있을 것이고, 워낙 어릴 때부터 식단 조절을 해와서 적게 먹는 체질이 되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그냥, 잘 먹는구나 싶어서."
"기분 나빠."

그러나 입안 한가득 튀김을 넣고 우물거리는 치즈루의 모습을 보면서, 단순히 병원밥이 맛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체중관리도 안 해도 되니까 마음껏 먹어도 되잖아. 물 줄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치즈루에게 페트병을 건네주면서 도시락 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벌써 반 정도 사라진 밥과 튀김의 잔해를 보면서 왠지 모를 뿌듯함에 슬쩍 미소를 지었더니 그녀가 다시 나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째려보았다. 나는 모르는 척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묵묵히 젓가락만을 놀리던 치즈루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이거 엄청 짜요."
"그 정도야? 물 더 줄까?"
"지금까지 먹었던 것들에 비해서, 라는 뜻. 뭐, 그게 아니어도 담백한 편은 아니겠지만요."
"아하, 그래서?"
"어쩌면 지금이 더 나은 거 아닐까요? 짠 것도 기름진 것도 맛있는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좀 나으면 다시 학교도 다니면서 친구들이랑 놀러 다닐 수도 있고."

그렇게 말하는 치즈루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창밖에 날리는 벚꽃잎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새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시기였다. 그녀의 시선 끝에 놓인 벚나무를 흘끗 쳐다보고, 다시 거의 다 비운 도시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글쎄, 과연 그럴까?"

치즈루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보았다. 그제야 생각만 하려던 말을 내뱉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쏘아붙이는 눈초리가 차가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을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설교를 할 자격도 마음도 없었기에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네 말이 맞아."

잠깐 의문이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 치즈루가 그냥 넘어가기로 결심했는지 젓가락을 들어 마지막 남은 가라아게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오래 있다니 할 일도 없으신가 봐요, 라고 비꼬는 말을 웃어넘기면서 나는 여전히 그 곁에 있었다. 그날은 일이 오전에 하나, 밤에 하나 있었고 드물게도 그 중간에 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은 반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그녀는 식사를 마친 뒤에도 나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나를 한번 보더니 무시했다. 다행히도 쫓아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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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지는 시간대였다. 창밖에 줄지어 선 벚나무가 하늘과 같은 다홍빛으로 물들어갔다. 따스한 오후에 감도는 나른한 기운이 우리 둘만의 하얀 방에까지 스며들어서, 조금 따분해진 나는 손에 든 대본 대신에 금빛 햇살이 책을 읽는 소녀의 푸른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간 듯한 자태로 책을 읽고 있던 치즈루가 문득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대본에 집중한 척을 했다. 어쩌면 치즈루 역시 나른한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책이 지루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간에 그녀는 덮은 책을 침대맡에 두고 티비를 틀어 아무 채널이나 돌렸다. 봄철을 맞아 꽃구경하기 좋은 국내 여행지를 소개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다지 흥미로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적적한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는 도움이 된 듯했다. 이내 코너 속의 코너로 패널들이 여행지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먹을 수 있는 에키벤을 소개했다. 그러자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도시락 고마워요. 맛있었어요."

라고 나를 보지도 않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울 것까지야. 다음에도 또 먹고 싶으면 말해줘."

웬일인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치즈루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푸른 그녀의 등 뒤로 붉은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밥도 얻어먹었으니까 오늘은 갈 때까지 얌전히 있으려고 했는데."
"음음, 그건 곤란하네. 도시락의 답례라면 침묵보다는 대화가 좋은걸~"
"노력해볼게요. 다음부터는."

다음부터는, 이라고 말했다. 치즈루가 다음 만남을 기약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면 내 얘기 조금만 들어줄래요? 혼잣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얼마든지!"

역광이라 순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언뜻 웃는 것 같이 보였다.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지, 괜히 침대 시트 위에 세운 손가락만을 빙글빙글 돌리던 치즈루가 입을 열었다.

"다들 그랬어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그만 놓아주라고."

발화는 꽤 갑작스러웠고 많은 것이 생략된 문장이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수없이 들은 적 있는 말이었으니까. 게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뻣뻣한 다리를 어루만지는 치즈루의 손길과 추억에 젖은 것처럼 부드러운 눈빛이 무엇보다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음 순간, 고운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맞아요. 그 자리에는 나밖에 없었는데, 그럼 누구의 잘못이겠어요?"

순간 숨이 멈췄다. 창문 너머로 저물어가는 노을이 경고등처럼 시야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두려움에 질끈 감은 눈꺼풀 너머로 익숙한 물거품이 떠올랐다.

"다들 나를 위로해주는 건 알지만… 진심 어린 말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어요."

치즈루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아까 했던 얘기도… 당신이 맞아요. 사실 알고 있어요. 나는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 다시 학교를 다니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지낸다 해도 클래식 음악이 들릴 때마다, 쇼윈도에 비친 흰 원피스를 지나칠 때마다, 연습실 것과 비슷한 나무 바닥을 밟을 때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매일, 매시간, 매초… 무대를 떠올리겠죠. 그 감각을, 행복으로 가득했던 나날을 떠올리면서 괴로워하겠죠.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나을 수는 없을 거예요. 이것 봐, 지금도 머리에 미련을 매달고 다니는걸."

자기 자신을 비웃으면서, 치즈루가 머리카락에 묶여있던 하얀 리본을 거칠게 잡아 풀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무대 위에서도 저 리본을 하고 있었던가. 그녀의 손에 들린 구겨진 리본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 만든 날개로 태양을 향해 날다가 추락해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여린 살을 찢고 돋아난 날개는 처음 생겼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사라져버렸을 테다. 그리고 새하얀 등에는 날개가 찢겨나간 검붉은 흉터만이 남아 날 수 없게 된 천사를 기리겠지.

내 앞에서 목놓아 울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대신 피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큼 꽉 깨문 아랫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래, 그건 분명 네 잘못이고, 저질러서는 안되는 실수였겠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푸른 눈동자에 비치는 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매정하게도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차마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이와중에도 줄기차게 떠들고 있던 여행 정보 프로그램은 어느새 내용이 바뀌어서, 물감을 푼 것처럼 새파란 열대의 바다를 보여주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보이는 건 결국 바다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단 한 번의 실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도 있는 법이야."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치즈루가 눈물을 닦고 숨을 고르는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억겁의 정적을 깨고, 그녀가 물었다.

"그럼 나는 어떡하죠? 앞으로 평생, 내가 죽여버린 나에게 용서를 빌며 살아가야 하나요?"
"……어쩌면."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말을 할 수가 있나요, 라고. 차마 내뱉지 못한 끝마디가 들리는 듯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자그마한 유리 모니터가 아니라 그녀의 눈동자에서 바다를 보았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소년을 기억했다. 그 소년이 사라진 자리에 서 있던 소녀를 기억했다.
나였고, 나이고,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
내가 그 바다에 두고 온 모든 것.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야. 너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고, 과거의 나는 지금의 너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의 내가, 미래의 네가 되지는 않았으면 해.

그러니까 나는 그 시절의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네게 해주려 한다.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위로를 감히 입에 담아본다.

"그렇지만 잘못의 대가를 전부 너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어."

용기를 내어 입 밖에 낸 말은 생각만큼 무겁지 않았고, 심지어 후련하기까지 했다.
나는 비로소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는 것도 잊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왜…"
"그러게, 왜일까."

나는 빙긋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을 펴서 내밀었다. 치즈루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그 이유를 너 스스로 알게 되는 날까지,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해줄래?"
"의미를 모르겠어…."
"차차 알게 될 거야."

해가 다 진 모양이었다. 약한 조명만 켜둔 병실에는 어슴푸레한 초저녁의 푸른빛이 감돌았다. 빼짝 마른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감싸 쥐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