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남

S#. 회상 - 오후, 멜라니의 진료소

​​여주인공의 다친 다리를 치료해주고 있는 멜라니. 거즈가 상처에 닿자 따가운 듯 여주인공이 몸을 움츠린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멜라니가 의자에 앉아있는 여주인공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멜라니: 조금만 더 참아. 곧 끝나.
여주인공: 네에…….
멜라니: (다리에 붕대를 감고 치료를 마무리한다.) ​이번엔 어쩌다 다쳤니?
여주인공: 숲에 갔는데, 새끼 사슴이 덫에 걸려있길래 구해주려다가, 나무뿌리를 잘못 밟아서 그만….​
멜라니: (혀를 쯧쯧 차고) 네 덕분에 사냥꾼은 허탕을 쳤겠구나.
여주인공: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미처 회수하지 못한 덫이었어요! 그 근처에 딱 하나뿐이었는걸요. 게다가, 아직 너무 어린 사슴이었고… (말하면서 침착함을 되찾고, 약간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린다. 비슷한 이유로 지적받은 적이 여러 차례 있는 듯한 모습.)
멜라니: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이 살짝 풀리면서 목소리도 약간 부드러워진다.) 아무렴, 네가 옳은 일을 했겠지. (다시 표정이 어두워지며, 무언가 싫은 기억을 떠올린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하지만, 남을 위해 네 자신을 희생하지는 마. 자기가 다쳐가면서 남을 돕는 건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짓이야. 그리고 넌, 아름답고 총명한 아이지. 그렇지 않니?
여주인공: (살포시 웃는다.) 그렇지만 멜라니 씨도 사람을 돕는 일을 하시잖아요? 물불 가리지 않고.
멜라니: 나는…… (말을 고르듯이 망설이다가) 잘 다치지 않는 체질이니까.
여주인공: 저도 건강하다구요.
멜라니: (깊은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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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오전, 멜라니의 집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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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 그런 네가 결혼이라니. 걱정을 놓을 수가 있어야지. (찻잔에 차를 따르며 피식 웃는다.)

여주인공: (잔을 집어들고 투정부리는 투로) 너무하세요!

멜라니: (자기 잔을 들어 마시지 않고 손잡이만 매만지다가) 이런 말이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는, 마사페리는, 내가 본 남자 중에 가장 믿을 만한 녀석이니까, 괜찮을 거야. 분명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야.

여주인공: 방금 그 말, 워렌 씨가 들으면 속상해하겠어요.

멜라니: 하하, 그이도 똑같이 생각할걸?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여주인공: 앞으로 많이 가르쳐주세요.

멜라니: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를?

여주인공: 선배… (부끄러운 듯이) 부부, 로서.

멜라니: ……아아, 그래.

 

창가에 내려놓은 멜라니의 찻잔을 클로즈업. 카메라가 그녀의 옆모습을 따라 이동한다. 착잡한 표정의 옆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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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밤, 멜라니의 집 거실

 

멜라니: 부부라, 그렇지. 부부였지.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중이었지, 참.

 

조소를 띄운 멜라니가 뒤를 돌아본다. 반대편에 서있는 워렌을 비추며 컷 전환.

 

멜라니: 늦었네.

워렌: 마사페리가 걱정이 많은 모양이라. 상담이 길어졌어. (눈치를 살피듯 몸을 기울이며) …날 기다린 거야?

멜라니: 좋을대로 생각해.

 

멜라니는 워렌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말린 약초를 분류하고 유리병을 깨끗이 닦는 일을 반복한다. 워렌은 창가에 기대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일과를 끝낸 멜라니가 손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침실로 들어가려다가 잠시 멈칫한다. 처음으로 멜라니가 워렌과 눈을 맞춘다.

 

멜라니: 워렌, 날 사랑해?
워렌: ……그래.
멜라니: 아직도?
워렌: 여전히.​
멜라니: 변함없이 어리석구나.

워렌: 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애칭에 흠칫 놀랐다가) 나는….

 

채 님 커미션

워렌이 멜라니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이마를 맞대어보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지 않다. 이내 워렌이 멜라니를 끌어안는다. 멜라니는 팔을 축 늘어뜨리고 맥없이 안겨있을 뿐이다. 멜라니가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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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회상 - 한밤중, 마을 외곽

 

몇 구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 혼란에 빠진 워렌의 뒷모습. 그가 고개를 돌리면 수풀 속에서 멜라니가 등장한다. 온통 피투성이다.

멜라니: 잘 들어, 워렌. 전부 내가 죽였어. 아버지라 부르던 남자도, 형제라 부르던 아이들도, 전부. (손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칼이 떨어진다. 쨍강, 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이제 후발대가 와서 날 죽이려 들겠지.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두고 도망치기만 하면 돼. (혼잣말로) 짐승 사냥이라니, 진짜 짐승인 게 누군데…….

​​​워렌의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를 클로즈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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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 텅 빈 인생이었어. 뭐라도 채워넣고 싶어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어. 적어도 그 사람은 내게 지붕이 있는 집과 먹을 것을 주었거든.

 

보름달이 무척 밝다. 역광을 받아 멜라니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멜라니: 그렇게 해서 괴물과 저주와 주술과 악마로만 채워진 인생에 처음 빛을 준 게 당신이었어. (희미하게 웃는다. 이제야 조금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다른 이들이 당신을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내게 당신은 두려운 괴물도 사냥해야 하는 짐승도 아니라, 소중한, 반짝이는, 아름다운… 사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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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가 꼼짝도 않고 서있는 워렌의 가슴팍을 두손으로 민다.

 

멜라니: 어서 가. 멀리로, 아무도 당신을 모르는 곳으로…

워렌: (엄마의 손을 부여잡는 어린아이처럼, 멜라니의 손목을 꼭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함께 가면 안되는 거야?

멜라니: 나는 너무 지쳤어. 더 걷고 싶지 않아. 여기에 멈춰서 당신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싶어. (고개를 든다. 그녀의 말대로, 몹시 지쳐보이는 미소.) 내 마지막 기억이 당신일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거야.

워렌: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자신의 간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단 사실을 깨닫는다. 손목을 잡은 손을 스르르 놓는다.) 그럼, 마지막으로… (멜라니를 품에 끌어안는다.)

멜라니: 그러고보면 당신은 이런 짓을 몇번씩 반복했으려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운 이름을 달고 다시 이방인부터 시작하는 삶을. (혼잣말처럼) 외로움을 타는 당신에게는, 힘든 일이었겠네….

 

두근, 두근, 하고 뛰는 하나의 심장 소리. 점점 커지는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그것을 덮는다. 포옹이 풀리고 한 덩어리였던 그림자가 둘로 쪼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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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회상 - 해가 밝기 직전의 새벽, 숲 속

 

감겨 있던 멜라니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열린다. 한쪽 눈이 피처럼 붉은 빛이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멜라니가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멜라니를 품에 안고 있는 워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멜라니: 나를 살렸구나.
워렌: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지만 그의 눈물은 메말랐다.)
멜라니: (멍하니 올려다보면서) 왜?
워렌: 너와 함께 있고 싶었어. 하루라도 더…​.

멜라니가 손을 뻗어 워렌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눈물 대신 핏자국이 그의 볼에 검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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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 나는 그게 마지막 날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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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붉은 달이 뜬 밤, 아이레스의 저택

 

계단 꼭대기에서 방문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레스. 고개를 꼿꼿이 든 방문자는 검은 망토를 눌러 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레스: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 멜라니. 제물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멜라니: (망토를 벗자 매섭게 쏘아보는 눈빛이 드러난다.) 그 애는 안 돼.

아이레스: 워렌과 똑같은 말을 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부라는 거야? (한껏 비웃는 투)

멜라니: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닥쳐. 

아이레스: 나는 도저히 너희를 이해할 수가 없어. 겨우 인간 하나가 그렇게 소중해? 너희와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계단을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려온다.) 나에게, (감히, 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힘을 주어서 발음한다.) 이렇게 화를 낼 정도로?

멜라니: 그 애는, 우리에게 없는 걸 전부 갖고 있어.

아이레스: (고개를 갸웃하며) 그래서?

멜라니: 그래서… 변하지 않았으면 해.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내뱉어 놓은 직후에 후회가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이레스: (유혹하듯이 얼굴을 가까이 하며) 갖고 싶지 않아? 뺏을 생각은 없어?

멜라니: (얼굴을 찌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뺏는다고 뺏어지는 거였다면 이럴 일도 없었겠지.

아이레스: 역시 모르겠어. (미간을 찌푸린 표정은 언뜻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보인다.)

멜라니: (비웃음을 띠고) 모르겠지, 넌.

아이레스: (얼굴을 일그러뜨린다.)